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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교실

일상의 공포에 관한 모범 답안 '검은 물 밑에서'

by 그럽디다. 2021. 8. 6.
**본문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공포 영화가 나카타 히데오의 <검은 밑에서>. ‘ 매개체로 느리게 스며드는 원혼의 공포와 서로만을 의지하는 모녀의 애틋함이 진하게 섞여 여운이 오래가는 공포영화다.

 

이혼 소송 중인 요시미는 6 이쿠코를 데리고 낡은 아파트로 이사한다. 윗집에서 물이 새는지 천장 구석에 얼룩이 있다. 아이가 뛰는 소음도 들린다. 위층 사람들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꾸가 없다. 아이가 현관에 있는 것을 얼핏 봤는데도 아무도 없는 척만 한다. 관리인과 부동산 업자가 책임을 미루면서 애꿎은 날짜만 가고, 그동안 천장의 얼룩은 점점 커지고 물이 뚝뚝 떨어지기까지 한다.

 

이쿠코는 허공에 대고 혼자 대화를 하기도 하고, 유치원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기도 한다. 그런데 요시미는 직장 때문에 이쿠코에게 소홀하게 되고, 양육권 분쟁에서 불리해진다. 요시미의 신경이 예민해져 가는 동안 얼룩은 점점 커지고, 불길한 조짐은 점점 불가해 한 일이 되어 간다. 모든 일은 2 동네에서 실종되었다는 아이와 관계있었다. 얼핏 위층 아이도 사실 아이였고, 집은 사실 1 전부터 비어 있었다. 요시미는 아이가 죽어 원혼이 되었고, 지금 이쿠코를 해치려 한다고 생각한다. 믿어주는 사람도, 도움 청할 사람도 없는데, 아이의 원혼이 드디어 이쿠코를 습격하기 시작한다.

 

 

<> 나카타 히데오 감독과 원작자 스즈키 코지가 다시 만났다는 사실로 기대를 모았던 영화다. 제니퍼 코넬리 주연의 <다크 워터>라는 제목으로 할리우드 리메이크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영화의 성공 이후 나카타 감독은 일본을 대표하는 공포영화 감독의 입지를 굳혔을 아니라, 할리우드와 영국에서 자신의 영화를 연출하는 발판도 마련했다.

 

하지만 1~2년에 한 작품 정도를 꾸준히 만들면서도
아직 <링>과 <검은 물 밑에서>를 넘을만한
걸작은 나오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이 <검은 밑에서> 좋은 공포영화라고 하면서도, 뻔하고 흔하고 고전적인 공포영화라고 한다. 주인공 가족은 새로 이사한 집에서 이상한 일들을 겪다가 그것이 소행임을 알게 된다. 령은 억울함을 간직한 원혼이었고, 억울한 사연을 알아간다는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검은 밑에서> 분명히 남다른 점이 있다. 남다름 눈에 도드라지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와 형식에 녹아있을 뿐이다.

 

 

공포영화인데도 이 영화에 없는 것들이 많다. 일단 피가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사람이나 동물이 죽는 장면이나 시체가 없다.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이나 사운드 효과가 거의 없다. 기괴한 형상의 귀신이나 괴물은 결말 부근에 가서 아주 잠시 등장하는데, 그나마 생긴 것으로 공포를 유발하려는 의도가 담긴 기괴한 분장도 아니다.

 

원혼이 인간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는 장면도 클라이맥스에만 잠깐 나온다. 전에는 문이 저절로 열린다거나 물건이 날아다니는 소소한 초현실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특수 효과도 필요 없다. 끝으로,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이 무서워서 지르는 비명이 번도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이 비명을 지를 일이 없다. 모든 공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주인공이 겪는 일들은 대부분 수긍할 만한, ‘있을 법한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을 이용한 공포영화지만 물속에서 뭔가 나타나거나 물이 물리적 법칙을 어기면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극히 드물다. 영화에서 물은 일상의 모습으로 공포를 자아낸다.

 

집과 물이 결부되었을 가장 두려울 만한 일상적 상황이라면 바로 누수와 침수다. 장마철에 벽이나 천정에서 물이 새고, 벽지에 곰팡이가 생기고 얼룩이 지고, 물방울이 맺혀 방안에서 떨어지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지, 겪어본 사람들은 모두 안다. 하물며 일을 이사 들어간 집에서 겪는다고 하면,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없다.

 

 

물론 일상에서 이것은 공포보다 불쾌함에 가깝다. 나카타 히데오는 일상의 불쾌함을 자연스럽게 제시한 , 이야기 진행에 따라 점점 증폭시킨다. 그것이 상식과 이해의 선을 넘고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면, 초자연적인 힘의 개입이 의심되며 불쾌함이 공포로 바뀐다. 천장의 얼룩은 점점 커진다. 사실 일찌감치 윗집 배관을 고치거나 아파트 방수 공사를 다시 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런데 관리인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윗집 사람들은 노크에 대꾸조차 안 하는 상식을 벗어난 일이 이어지는 동안 얼룩은 물방울로 맺혀 요시미의 침실에 침투한다.

 

얼룩과 물방울은 천장 구석에서, 요시미가 누워 자는 침대 머리맡을 향해 점점 다가오더니, 나중엔 요시미와 방안을 흠뻑 적실 지경에 이른다. 원혼이 등장하긴 하지만 원혼이 주도적으로 그렇게 하는지를 굳이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원혼과 기현상은 별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주인공의 두려움에 공감하고 있다. 겨우 일상이 과장된 것으로 공포가 만들어진 것이다.

 

요시미의 현재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의 과거와 이어진다. 영화의 장면은 어린 시절의 요시미가 유치원에서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장면이다. 유치원에서, 마중 나온 엄마와 귀가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폭우 속에 외롭게 앉아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요시미를 버린 엄마는 지금도 딸을 외면하고 있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요시미는 어린 시절 몽유병을 앓은 적이 있고, 남편은 이런 그녀의 과거를 정신병 문제로 엮는다. 법원 인터뷰에서 요시미는 이에 대해 열심히 해명하지만, 정작 이쿠코가 자기와 똑같은 스트레스와 행동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순수한 모성애로 회귀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떠나지 않을게.라는 요시미의 말은 엄마로서의 당연한 진심을 훨씬 넘어선 진심으로 다가온다.

 

 

요시미와 이쿠코가 겪은 것과 같은 분리 불안에는, 엄마가 곁에 있는 것이 최선이다. 요시미 본인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고, 지금 이쿠코를 위해서는 곁에 있어 주려고 한다. 마음을 확인한 시점에 이야기는 확장된다. 실종된 아이의 원혼 역시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였다. 요시미의 모성애는 원혼이 아이의 외로움까지 공감한다. 동시에 원혼 아이가 이쿠코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요시미는 이쿠코를 살리기 위해서 원혼 아이를 품에 안을 수밖에 없다. 관객은 이쿠코 곁을 떠나지 않겠다던 요시미의 약속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알기에,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 얼마나 숭고한 희생인지 느낀다. 그리고 엄마를 눈앞에서 빼앗기는 이쿠코의 서러움과 막막함도 절실하게 닿는다.

 

 

요시미가 원혼 아이와 공감하는 데는 물이 매개체로 작용했다. 원혼이 물에 스며들고, 물이 사물에 스며들고, 사물에 맺힌 물이 다시 요시미에게 떨어졌을 , 요시미는 죽은 아이의 마지막 기억을 전달받는다. 모두가 떠난 유치원에 혼자 남겨졌을 , 비를 맞으며 길을 혼자 걸어 집에 , 아무도 없는 대신 옥상에 올라가 혼자 , 그리고 어두운 물속에서 혼자 죽어갈 아이가 느꼈을 외로움과 두려움의 크기가 얼마나 컸을까? 마음을 느낀 요시미는 결코 아이를 외면할 없었을 것이다.

 

 

차갑고 검은 밑에서 허우적대던 이는 죽은 아이만이 아니다. 요시미는 다시 홀로 서야 했지만 출산과 육아로 중단된 커리어를 이어가기 쉽지 않은 엄마다. 그리고 과장된 비난으로 상처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쿠코와 원혼은, 책임 전가에만 급급하고 이웃에게 무관심한 어른들 때문에 위험에 방치되고만 아이였다. 이기적이고 파편화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 같은 처지다. 영화에서 아이를 모두 구원한 요시미의 힘은 두뇌나 근력도 아니고, 재력이나 연줄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엄마로서의 순수한 모성애였고, 거기에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아는 공감 능력, 해야 일을 아는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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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윤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