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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열전

이게 감동 받을 일인가? 플레처 교수

by 그럽디다 2021. 7. 5.

이미지 = 영화  < 위플래쉬 >

 

늦은 시간, 학교에서 홀로 드럼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앤드류 앞에 악마적인 카리스마로 유명한 플렛처 교수가 나타난다. 몇 가지 연주를 시켜보더니, 말도 없이 떠나버리는 플렛처. 일생의 기회를 잡은 것인지 놓친 것인지, 플렛처의 밴드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앤드류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플렛처 교수가 상대를 압박하는 방법이 이렇다. 자신의 밴드를 연습시킬 땐, 연주를 갑자기 멈추고, 틀린 학생을 몰아세운다. “연주가 느린 거 같나? 빠른 거 같나?” 그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차이를 근거로 상대를 몰아세운다. 

 

이미지 = 영화  < 위플래쉬 >

 

 

다음엔 브라스 연주자 한 명이 타겟이다. “조율이 맞은 것 같나? 틀린 것 같나?” 학생은 울면서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고, 플렛처 교수는 학생을 그 자리에서 내쫓는다. 학생이 나가자 플렛처는 남은 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 틀린 건 방금 나간 학생이 아니었다고. 그러나 자신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도 모르는 게 더 저질이라고. 연습실 안에 지옥 같은 정적이 엄습한다. 누구 하나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했다. 데미언 차젤 감독은 <위플래쉬>를 장편으로 만들기 전에, 단편 버전으로 선댄스에서 수상한 적이 있다. 이 에피소드는 그대로 쓰였었고, 물론 여기서도 악마 같은 교수는 J.K. 시몬즈가 맡았다. 

 

이미지 = 영화  < 위플래쉬 >

 

어두운 탑 안에 감시자가 있고, 주변을 둘러싼 감방에 죄수가 있는 감옥구조를 파놉티콘(panopticon)이라고 한다. 벤담에 의해 개념이 만들어지고, 푸코 등의 이후 철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확장된 이 개념은 흔히, 정보를 가지고 있는 소수의 권력자가 정보가 없는 다수를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상황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두운 곳의 감시자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 보고 있다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 처절한 통제가 자율적으로 유지된다. 음악적으로 엄청난 경지에 올라 있는 플렛처 교수는 아직 그것을 따라 하는 것도 벅찬 학생들과의 능력 차이를 이용해서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협박한다. 플렛처 교수와 앤드류가 조우하는 첫 장면, 천장 조명 아래에서 연주하던 앤드류는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플래처 앞에서 연주하는 동안, 자신이 밝아 벗겨지는 듯한 가혹함을 겪어야 했다. 

이미지 = 영화  < 위플래쉬 >

사실, 플렛처 교수가 학생들과 무대에서 조명을 받을 때도, 어두운 객석엔 실눈을 뜨고 바라보는 심사위원이 있었다. 새롭게 확장된 파놉티콘이다. 한 번의 실수로 바로 매장당할 수 있는 중요한 무대에선 더욱 그렇다. 플렛처 역시 누군가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믿을 것은 최선을 다하는 노력뿐이다. 플렛처는 자신이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학생들이 한계를 이겨내는 것이라고 했다. 대중과 평단을 이겨내고 꿈을 이루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학생들이 꿈을 쫓는 한 플렛처의 폭력은 정당하다. 

이미지 = 영화  < 위플래쉬 >

 

한편으로 그는, 죽은 제자의 연주를 들으며 눈물을 보이고, 친구의 어린 딸에게 하이파이브로 애정을 과시한다. 결국 앤드류는 스승이 원하던 대로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최고의 연주를 한다. 그럼 이 영화, 해피 엔딩인걸까? 플렛처 교수는 욕먹을 각오로 학생들을 몰아세우는 참스승인걸까?

 

이미지 = 영화  < 위플래쉬 >

 

영화관을 나오면서 <위플래쉬>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열정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플렛처 교수가 학생들을 악마적으로 다스리는 사이, 한 학생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했고, 앤드류 역시 죽을 고비를 넘겼다. 플렛처에서 시작된 폭력은 일류가 되기 위해 병적으로 집착하는 앤드류를 통해 주변으로 전이되었다. 그는 동료 뮤지션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했고, 음악에 집중하고 싶다며 여자친구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 그럼에도 플렛처가 악당인지 참스승인지,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연인과 친구를 버리면서까지 일류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수가 적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인간과 관계를 연료로 태워 완성된 명작에서, 불편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많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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