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엇갈리는 ‘위대한’ 영화들
인생사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지만, 이렇게 엇갈리는 운명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위대한’ 이야기들을 모았다.
'위대한 영화'를 만드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다만 일단은 작품제목에 '위대한'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 또한 꽤나 그럴듯할 것 같다.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관객들에게 뭔가 한방 먹이는 것 같지 않은가? 얼마 전 작고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저서 '위대한 영화'를 책 제목 때문에 사서 봤다는 영화광들도 여럿이다. 조용필의 백밴드 이름 '위대한 탄생'도 그렇다. 얼마나 훌륭한 네이밍인가.
엇갈리는 인생사 [위대한 개츠비]
아무튼 그런 와중 F. 스콧 피츠제럴드의 고전 [위대한 개츠비]의 2013년도 버전이 공개됐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듯한 맥락은 마치 전위적인 연출로 유명한 데릭 자만 감독의 시대극 같았고 (예고편에는 무려 힙합가수 제이지의 곡이 깔린다), 바즈 루어만 특유의 눈 아플 정도로 화려한 영상과 카메라, 그리고 과장된 캐릭터들이 비극적인 춤을 추듯 흘러간다. 원작소설은 호황이던 당시 미국 거품경제의 환락을 허무하게 바라보는 듯 보였지만 바즈 루어만 감독은 항상 그래왔듯 그 화려함을 더 미친 듯이 부각시켜냈다. 개츠비가 한차례 엇갈린 옛 사랑 데이지를 못 잊어서 위대한 건지, 아님 입신양명해서 위대한 건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아무튼 뭐 이래저래 위대하고 볼일인 것 같다.
역시나 엇갈리는 인생사 [위대한 유산]
에단 호크가 공원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다가 기네스 펠트로와 키스하는 장면이 유행 비슷한 것을 낳았던 1998년도 버전 [위대한 유산] 역시 [위대한 개츠비]와 마찬가지로 몇 차례 영화화된 고전이었다. 뭐 [위대한 개츠비]만큼이나 적절히 상실감을 지닌 등장 인물들도 등장하고 안타깝게 엇갈리는 과거사 등등이 데자뷰 되곤 하는데 아무튼 고전을 각색한 작품들은 확실히 어떤 기구한 맛이 있었다. [위대한 유산]의 에스텔라 또한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처럼 남주인공이 잠시 부재한 상태를 참지 못하고 재력있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리는 우를 범한다. 역시 결혼은 타이밍이라는 사실을 여기저기서 깨닫게 되는 요즘인 것 같다.
또 다시 엇갈리는 인생사 [위대한 레보스키]
뭐 엇갈림이야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만 이번에는 동명이인이기 때문에 엇갈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볼링이나 치면서 놀기 좋아하는 백수건달 제프 레보스키의 집을 같은 동네 살고있는 백만장자 제프 레보스키 집인 줄로 혼동하면서 강도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범죄집단과 경찰, 그리고 두 레보스키가 납치사건과 돈가방 사이에서 허둥지둥댄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오해가 피를 불러일으킨다거나, 혹은 선택에 있어 큰 작용을 해내는데 이 작품의 경우 일상의 오해가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어내면서 뒤죽박죽 엉켜가는 상황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파티를 좋아하는 건달 레보스키, 그리고 재력을 가진 부자 레보스키를 ‘긍정적으로’ 합쳐낸 캐릭터가 바로 개츠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엇갈리는 인생사 [위대한 앰버슨가]
거장 오손 웰즈의 고전 [위대한 앰버슨가]는 시대변화에 갈등하는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이 꽤나 오묘하게 작용해낸 걸작이었다. 자동차 회사를 설립해 자수성가한 유진은 이사벨 앰버슨에게 세레나데를 부르다가 실수해 딱지를 맞지만 이후 수십 년이 지나 다시금 재회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그들 각자의 자식들 또한 서로 사랑하려 하니 이 무슨 일일연속극 스러운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사벨의 아들 조지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이사벨은 단 한번이라도 유진을 만나보고 싶다는 말을 남긴 채 유진의 얼굴도 못보고 쓸쓸히 눈을 감는다. 왜 이렇게 '위대한'을 제목으로 쓰고있는 영화들은 항상 엇갈리려고만 하는지를 모르겠다. 엇갈리는 안타까운 삶을 살기 때문에 그 아픔을 딛고 위대하게 성장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실 그게 뭐든 간에 쉽게 풀리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한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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