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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 사전

<괴물> “니들 그 냄새를 맡아 본 적 있어?”

by 꿀마요 2021. 12. 7.

명대사 사전 : <괴물> “니들 그 냄새를 맡아 본 적 있어?”

이미지=영화<괴물>&nbsp;ⓒ청어람


괴물은 강두(송강호)의 눈앞에서 현서(고아성)를 채 갔다. 열세 살 딸아이를 데리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저렇게 멀리 가면 현서가 헤엄쳐 나올 수 없을 텐데. 저 물속에서는 현서가 숨 쉴 수 없을 텐데. 강두는 무작정 쫓아 들어가 보지만, 괴물은 너무 멀리 가버렸다. 참으로 못난 아비인 강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고모도, 삼촌도, 할아버지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현서의 영정만 바라본다. 어느새 어미를 똑 닮은 얼굴로 자란 현서가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그 표정이 너무 밝아 목이 더 멘다.

현서의 전화가 강두에게 닿았다. 한강 어딘가에 현서가 살아있다. 한강변을 수색하는 저 많은 경찰과 공무원이라면 현서를 찾아, 괴물에게서 구출할 수 있겠지. 하지만 당장 앞에 있는 경찰관이 강두 말을 믿지 않는다. 핸드폰 착신 내역 한번 확인해보면 달라질 얘기다. 하지만 경찰은 서류를 내민다. ‘서류는 거짓말 안 한다’던 <살인의 추억>의 서태훈 형사도 아니고, 사망자 명단을 믿고, 가족의 말을 믿지 않는다. 강두가 꿈을 꾼거고 착각일 거라고 단정한다.

이미지=영화<괴물>&nbsp;ⓒ청어람




구조를 기다리는 딸과 부모. 국가가 나서주기를 바라지만, 국가는 거기에 없었다. 국가는 지능 떨어지는 부모 말을 믿는 대신, 미국이 말하는 실체 없는 ‘바이러스’때문에 전전긍긍한다. 때문에 그 많던 경찰들과 공무원들을 철수시키고, 텅 빈 고수부지에는 털털거리는 방역차들만 남았다. <괴물>에는 꽤 많은 뉴스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엔 유가족이나, 실종자 가족에 관한 얘기는 없다. 심지어 우리 정부에 관한 얘기도 없고, 바이러스에 대한 주한 미군, 미국, WHO의 입장과 조치에 관해서만 떠들어 댄다. 아이를 구해달라고 외치는 아비와 가족의 눈물 앞에 서류를 들이밀고, 강대국 눈치만 보는 국가와 언론은 공감 능력과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껍질만 남은 시스템이다.

 



국가는 아이의 목숨을 지킬 의무를 방기했지만, 부모는 그럴 수 없다. 참으로 못난 아비인 강두와 늙은 할아버지, 백수 삼촌, 패배자 고모가 직접 무기를 들고, 그 넓은 한강을 뒤져 괴물과 싸우겠다고 나선다.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이들도 처음부터 용기를 내진 못 했다. 사망자 명단을 들고 있던 경관이 등을 돌리고, 할아버지와 아비와 삼촌이 누가 잘 했네, 못 했네 하며 티격태격하고 있었을 때, 이들을 하나로 집중시키고, 행동을 결심하게 한 것은 고모(배두나)의 말 한마디였다.


“아빠, 현서가 지금 며칠째 굶은 거지? 하수구에서?”

이미지=영화<괴물>&nbsp;ⓒ청어람


너무나 평범하고 단순한 걱정이지만, 이게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인가? 약자인 이들이 시스템에 거스르면서까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것은, 당장 거기서 우리 아이가 굶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한 끼만 걸러도 부모는 속상하다. 그런데 아이가 며칠째 굶고 있다면? 목숨이 달린 문제라면? 시간이 없다. 얼마나 절박한 순간인지 누구나 공감하게 된다. 골든타임의 개념이 지극히 보편적인 감정과 연결된다.

 



<괴물>은 극장에서만 천삼백만 관객이 공감한 영화다. <괴물>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정서가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증거다. 부모 자식 간의 감정에 의해 진행되는 이야기 아닌가. 사이코패스가 아니고는 여기에 공감 못 할 사람은 없다. 부모인 강두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건, 역시 강두의 부모인 희봉(변희봉)이다. 희봉은 아들의 심정을 이렇게 대변한다.

이미지=영화<괴물>&nbsp;ⓒ청어람



“니들, 그 냄새를 맡아 본 적 있어? 새끼 잃은 부모 속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냐, 이 말이여! 부모 속이 한 번 썩어 문드러지면, 그 냄새가 십리 밖에까지 진동 하는 거여!“

핵심은 ‘속이 썩는다’는 것보다, ‘그 냄새가 십리 밖에까지 진동 한다’는 것에 있다. 새끼 잃은 부모 속이 얼마나 비통한지, 십리 밖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알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는, 머리가 아닌 본능으로 느껴질 일이다. 이건 부모가 되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모를 감정이 아니다. <괴물>은, 개인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이 감정을 시스템이 공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위기가 이어지고,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괴물>의 마지막 씬. 강두는 현서가 품에 안아 목숨을 살린 소년과 따뜻한 밥을 먹는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밥상에선 모락모락 김이 난다. 그들은 행복해보이며, 평화가 돌아온 것 같다. 해피엔딩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씬의 시작을 보자. 매점에 앉아 밤의 고수부지를 내다보던 강두는, 어둠 속에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자 긴장한다. 강두는 그 사건을 잊지 않고, 아버지와 현서의 죽음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강두가 가진 불안의 원인은 개인적인 트라우마 차원이 아니다. 프롤로그의 미군이 말한 것처럼, “한강은 아주 넓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포름알데히드가 쏟아져 들어갔다. 괴물은 언제든 또 나타날 수 있음을 처음부터 암시했다. 꼭 괴물이 아니라도, 사고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일어난 사고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강두는 시스템을 믿을 수 있을까?

이미지=영화<괴물>&nbsp;ⓒ청어람



현실에서는 어떨까? 시스템 곳곳에 뚫린 구멍들이 세월호를 침몰시켰고, 정부는 아이들을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해 신뢰를 잃었다. 1년 반 넘게 지나 특조 청문회가 열렸지만 사고 원인 규명도, 책임 규명도 지지부진했고, 음모론과 정부의 무책임함과 언론의 무관심만 재확인한 것 같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은 더 안전해졌던가? 올여름 메르스 사태는, 우리 시스템이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만 일깨워줬다. 괴물은 예고 없이 나타나 내 옆의 사람을 채 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시스템을 믿고 있어도 될까? 뼈아픈 경험을 한 강두는, 손이 닿는 자리에 엽총을 꺼내 놓고 장사한다. 매점 안에 틀어둔 TV에서는, 바이러스는 없었더라는 미국의 발표를 생중계로 보도하고 있다. 시스템은 여전하다. 강두는 TV를 발로 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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