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원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던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인랑]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한 이후 가상의 시공간. 독일의 통치에서 벗어난 일본 정부가 성장중심의 경제정책을 무리하게 밀고 나가자 빈부격차, 실업 등의 사회 문제가 극에 달한다. 이에 슬럼가를 중심으로 시민들의 데모가 끊이지 않았으며, 반정부단체 ‘섹트’는 공권력을 상대로 테러를 일삼는다. 정부는 이런 소요를 잠재우기 위해 수도경을 창설한다. 특히, 첨단 프로텍트 기어(강화복)와 중화기로 무장한 ‘특기대’를 앞세워 반정부단체를 무자비하게 사살한다. 케로베로스(지옥의 파수견)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이들은 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작품은 섹트를 진압하던 중 한 소녀의 자폭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특기대원 ‘후세 카즈키’와 자살한 소녀의 언니 ‘야마미야 케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사실, 야마미야 케이는 자폭한 소녀의 언니가 아니었고 후세 카즈키를 통해 특기대를 교란하려는 섹트의 스파이였다. 특기대와 후세 카즈키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새 연정이 싹튼 두 사람 사이에 서로의 진심을 알 수 없는 말들이 오간다.
작품은 거대 공권력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개인의 삶을 다룬다. 실제로 1960년대 일본의 전공투 세대였던 오시이 마모루가 청춘시절 온몸으로 겪었던 정서가 가득하다. 서양 잔혹동화 ‘빨간망토’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특기대의 후세 카즈키가 ‘늑대’로, 빨간 숄을 두르고 등장하는 야미미야 케이가 ‘빨강망토 소녀’로 대입된다.
셀 애니메이션 시대 마지막 명작
[인랑](2000)이 제작되던 당시에는 투명판 위에 여러 장의 그림을 촬영하는 방식의 ‘셀 애니메이션(Cel Animation)’이 요즘의 디지털 제작방식으로 전환되어가던 시점이었다. 2002년에 발매된 [인랑]의 DVD 박스세트의 서플먼트에서는 셀 애니메이션 작업에 일부 디지털 방식이 추가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 [인랑]은 제작된 지 거의 20년이 되었지만, 지금 감상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준다.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인랑]은 셀 애니메이션 시대 마지막 명작으로 기억된다.
기술적인 부분 이외에도 작품은 인상적인 성취를 남겼다.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긴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사이키델릭한 결말로 도망가버리는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인랑]은 특유의 묵직하고 우울한 정서를 지켜내며,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 다른 결을 기록했다.
케로베로스 사가
애니메이션 [인랑]은 [공각기동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시나리오를 집필한 작품이다. 연출은 오키우라 히오유키 감독이 맡았지만, 오시이 마모루가 구축한 ‘케로베로스 사가’의 네 번째 작품으로 분류된다.
영화화되면서 일부 설정이 변경되기도 했지만, 김지운 감독의 [인랑] 관람에 앞서 ‘케로베로스 사가’에 대한 이해하는 게 도움이 되겠다.
케로베로스 사가는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패배하고 독일이 세계를 점령했다는 가정으로 펼쳐지는 가상의 역사극이다. 모두 9편으로 구성되어있는데, 특이하게도 각각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라디오 드라마, 소설, 해설서 등 다른 형태의 매체로 발표되었다. 기본적인 설정과 주제의식을 공유하지만,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케로베로스 사가는 [붉은 안경](1987), [케로베로스 지옥의 파수견](1991) 등의 실사 영화가 포함되어 있다. 김지운 감독의 [인랑]이 특기대의 강화복을 실사 영상으로 옮긴 첫 작품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진중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애니메이션 [인랑]에 비교하자면, 이 두편의 실사 영화는 난해한 설정과 개연성을 무시한 전개가 특징인 컬트 영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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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앤건 = 글: 김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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