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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조각미남 ‘신성일’에 대해 알아보자

국내스타 비하인드

by 미드나잇 스포일러 2021. 12. 25.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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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우리 곁을 떠난 배우 신성일. 

본명 강신영. 1957년 한국 배우전문학원에 입학한 그는 신필름의 배우 공모에 응시하여 합격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는다. 당시 신필름은 그에게 ‘신필름의 뉴스타 넘버원’이란 의미로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고, 그는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빠빠>에 둘째 아들 바른이로 스크린에 첫 데뷔를 하게 된다.

로맨스빠빠(1960)


그의 데뷔작은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빠빠>였다. “‘작은아들 바른이입니다.” 라고 멋지게 거수경례하며 등장한다. 신성일은 집안의 구질구질한 잔심부름은 모두 자기 차지라고 투덜대는 귀엽고 당돌한 성격의 캐릭터 ‘바른이’를 연기했다. 그러나 그의 연기 인생이 처음부터 순탄하게 풀린 것은 아니었다. <로맨스빠빠> 이후에도 몇 작품에 출연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낌없이 주련다(1962)


그러다가 1962년 한운사의 인기 방송극을 영화화한 <아낌없이 주련다>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다. 1.4 후퇴 당시의 부산, 남편을 잃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술집의 마담을 하는 미망인과 지배인 사이의 정열적인 사랑을 그린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한다. 신성일은 교양 있는 미망인 역을 맡은 한국의 ‘에바 가드너’ 이민자와 호흡을 맞추며 주목을 받게 된다.

가정교사(1963)


<아낌없이 주련다>를 계기로 극동흥업과 연을 맺은 신성일은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가정교사>의 주연을 맡는다. 사장과 감독이 남자주인공을 놓고 고민 중인 것을 알게 된 신성일은 그길로 이발소에 가서 캐릭터의 헤어스타일인 스포츠머리를 깎는다. 영화는 크게 성공했고, 신성일은 반항적인 이미지의 청춘배우로서 자리매김한다. 이 영화를 계기로 스포츠머리가 크게 유행하게 되면서 ‘신성일 머리로 깎아달라’는 주문이 크게 늘었다.

맨발의 청춘(1964)


깡패 두수와 외교관의 딸 요한나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영화 <맨발의 청춘>은 한국영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히트작이다. 부잣집 딸과 하류인생의 사내가 사랑을 나누는, 그야말로 60년대 영화계를 휩쓸었던 '신데렐라맨'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맨발의 청춘>을 시작으로 멜로영화의 새 유망주가 된 신성일은 인기배우 엄앵란과 계속 합을 맞춘다. <특등신부와 삼등신랑>, <청춘교실>, <말띠여대생>등 30여 편의 청춘영화가 모두 흥행하며 황금콤비로 이름을 날린다.

배신(1964)


호숫가에서 보트가 저어 멀리 사라지는 장면, 카메라가 닿지 않는 지점에 이른 엄앵란과 신성일은 연기가 아닌 실제 키스를 나누며 사랑을 확인한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공식 연예인 커플 1호의 탄생이다.

몇 편의 영화를 함께하며 사랑을 키워나가던 신성일과 엄앵란은 1964년 11월 워커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두 사람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결혼식은 아직도 한국 연예계 사상 가장 성대했던 결혼식으로 기억된다.


초우(1966)


<초우>는 ‘문희’를 빅스타로 만든 작품이다. 이후 문희는 ‘남정임’, ‘윤정희’와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구축했다. 신분 상승을 꾀하는 자동차 정비공 철이(신성일)와 프랑스 대사집의 식모인 영희는 서로의 신분을 속인 채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거짓말이 들통나고 둘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주제곡인 ‘초우’를 부른 패티 김도 스타 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별들의 고향(1974)


신성일의 대표작을 이야기할 때 <별들의 고향>이 빠질 수 없다. 순진하고 맑은 성격의 경아가 여러 남자를 거치며 점차 추락하는 내용을 담은 <별들의 고향>은 경아라는 캐릭터의 흥행과 더불어 호스티스 영화의 유행을 낳는다.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아저씨, 추워요, 안아주세요.” 이 명대사는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자주 패러디된다.

영화 <잃어버린 태양>(1964)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신성일은 이후 정치계에 뛰어든다. 두 번의 낙선, 한 번의 당선과 뇌물수수 혐의로 인한 수감 생활까지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살았던 그는 전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만다.

그리고 지난 2013년 <야관문: 욕망의 꽃>으로 20여 년 만에 컴백하여 영화인으로서의 정정함을 과시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성일가’를 짓고 동물들과 함께 활기찬 노년 생활을 보여주던 그의 죽음은많은 영화팬을 안타깝게 했지만, 정작 신성일 자신은 마지막까지 의연한 모습이었다. “생존율 같은 통계는 믿지 않는다, 희망과 기적을 보여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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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앤건 =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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