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 공포영화들을 만나본다. 오늘은 아카데미가 선택한 최고의 공포영화 <양들의 침묵>이다.
아카데미상의 주요 5개 부문인 작품상, 감독상, 각본(각색)상, 그리고 남녀 주연상을 모두 받은 영화는 장르를 막론하고 단 세 작품뿐이다.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그리고 <양들의 침묵>이다. 또 <양들의 침묵>은 역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유일한 공포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 외에 작품상 후보에라도 올랐던 공포영화는 <엑소시스트>와 <죠스> 뿐이다.
한니발 렉터는 미국 영화 학회가 꼽은 20세기 최고의 악역에 선정된 탁월한 캐릭터다. 하지만 영화 <양들의 침묵>은 한니발에 의해서만 완성된 영화가 아니며 주인공은 엄연히 클라리스 스탈링이다. 이미 <피고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조디 포스터는 안소니 홉킨스에 못지 않은 명연기로 두 번째 오스카를 손에 쥐었다. 여기서는 이미 많은 리뷰에서 다루어진 한니발 대신 주인공 클라리스를 중심으로 <양들의 침묵>을 다시 보기로 한다.
여자들의 가죽을 벗기는 연쇄 살인마 ‘버팔로 빌’의 윤곽이 잡히지 않는 가운데, FBI 행동과학부의 크로포드 부장은 더 면밀한 프로파일링을 위해 수감 중인 연쇄 살인범들을 하나씩 인터뷰한다. 유일하게 협조를 거부하는 식인종 한니발 렉터 박사를 설득하기 위해 크로포드는 명민한 훈련생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을 차출한다. 한니발은 자신에게 정식 요원이 아닌 애송이를 보낸 데 자존심이 상하지만 순수하고 당찬 그녀의 정신세계에 관심을 보인다. 클라리스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조금씩 털어놓는 것으로 거래하듯 버팔로 빌에 관한 힌트를 얻어간다. 수수께끼 같은 힌트지만 클라리스는 하나씩 풀어가며 버팔로 빌에게 접근한다.
그러던 중 버팔로 빌은 또 한 소녀를 납치하는데, 그가 상원의원의 딸로 밝혀지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의원의 적극적인 협조로 한니발은 임시 감금시설로 이감되고, 클라리스는 자발적으로 그를 찾아간다. 다급한 상황을 이용해 결국 클라리스의 내밀한 고백을 끄집어낸 렉터는 수사 방향에 관한 마지막 조언을 전하고, 잔인한 수법으로 탈옥하여 자취를 감춘다. 크로포드와 수사관들은 렉터가 남긴 단서에서 용의자의 신원을 알아내 일리노이로 출동하고 클라리스는 한니발의 조언에 따라 첫 희생자 주위를 다시 탐문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가장 어두운 기억이 뭐지?” 남에게 내 머릿속을 들킨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게다가 상대는 최고의 정신분석학자 한니발 렉터. 단시간에 자신의 초라했던 과거를 간파해내는 통찰을 가졌다. 원하는 얘기를 들려줬다간 클라리스의 정신은 말 그대로 발가벗겨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많은 인육을 ‘먹은’ 것처럼 영혼을 먹어버릴지도 모른다. 꿰뚫어보는 눈빛 앞에 떨리는 표정을 감출 수 없다. 하지만 이 애송이는 그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버팔로 빌을 잡아 많은 피해자를 구하고, 존경하는 상사 크로포드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수사에 점점 더 깊이 관여하면서 사건 해결에 관한 클라리스의 욕망도 더욱 커졌다. 욕망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클라리스는 이 악마에게 발가벗겨지는 것을 기꺼이 허락한다. 두 사람은 각자 원하는 질문과 대답을 번갈아 주고받는다. 클라리스는 자신의 악몽에 관해 털어놓는다. 열 살 때의 기억인 새끼 양을 안고 달아나는 장면은 플래시백으로 삽입될 예정이었고 촬영 일정도 잡혀 있었다. 하지만 두 아카데미 인증 배우의 열연에 감독은 그 촬영계획을 취소한다. 대사와 얼굴 클로즈업만으로 이루어진 이 상담씬은 어떤 베드씬보다도 격렬하고 끈적인다.
클라리스는 영화 내내 어딘가의 문을 열고 낯선 공간으로 들어간다. 첫 장면부터 야외 훈련장의 안갯속을 혼자 뛰어다닌다. 크로포드의 사무실 복도는 미로 같고 한니발을 처음 만나러 수용시설 지하로 내려가는 과정에선 몇 번이나 그녀의 등 뒤에서 철문이 잠긴다. 한니발의 개인 창고 ‘유어셀프’ 안으로 기어들어갈 땐 상처마저 입는다. 하나같이 어둡고 칙칙한 곳이고 소품 하나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다. 전부 엽기적인 살인과 관련된 공간들이니 오죽할까.
어두운 미궁을 헤맨다는 콘셉트는 버팔로 빌의 행적을 찾아간다는 수사영화의 기본 플롯과 맞아 떨어지고, 아울러 트라우마를 가진 클라리스의 내면을 탐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길 찾기의 안내자가 하필 최악의 정신세계를 가진 살인마다. 위험하고, 바라는 것도 많으며, 불친절하다. 그를 섣불리 따라갔다간 혼란 속에서 미아가 되거나 그의 저녁 식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클라리스는 자신의 의지로 이 모험을 강행한다. 스스로 점점 더 섬뜩한 미궁으로 들어선다. 공포영화의 여주인공 중에 이보다 능동적인 캐릭터는 없었다.
아직 FBI ‘훈련생’인 클라리스는 여자이고, 눈에 띄게 왜소하다. 다른 훈련생이나 시골 보안관들은 다들 그녀보다 머리 하나씩은 큰 남자들이다. 모두 그녀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미녀라서 더 그렇다. 한니발이 감금된 수용소의 다른 사이코패스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소장인 칠튼 박사까지도 그녀에게 추파를 던진다. 새로 발견된 버팔로 빌 희생자를 부검하러 간 곳에서는 여자라는 이유로 소외당한다. 남자들이 대부분인 세계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언제나 남자들의 무례한 시선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며, 때로는 심한 성희롱도 당한다.
그런 그녀에게 버팔로 빌의 희생자들은 남 같지가 않다. 물에서 건져낸 시체를 검시할 때, 카메라는 끔찍한 몰골의 시체 대신 그 참상을 기록하며 비통함에 치를 떠는 클라리스의 얼굴만을 보여준다. 사회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클라리스는 버팔로 빌의 비틀린 욕망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피해자뿐 아니라 범인과도 자신을 동일시하는 범죄 프로파일링의 방식은 전작 <레드 드래곤>의 주인공 그레이엄의 주특기이기도 했다. 영화가 끝날 때 클라리스는 정식 FBI 신분증을 발급받고 수사관의 꿈을 이룬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보안관이었다. 처음 한니발의 심리전과 믹스의 성희롱에 충격을 받았을 때 클라리스는 제복 입은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기억을 떠올리며 위안받는다. 클라리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사관이 되고자 한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훌륭한 수사관인 크로포드가 채워주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비중이 줄었지만 원작 소설에는 클라리스가 크로포드를 남자로도 사랑한다는 암시도 있다. 크로포드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한니발에게 더 의존하게 되는 형국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클라리스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한니발은 초면이나 다름없는 클라리스에게서 이 감췄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자신을 지켜주던 존재가 사라진 클라리스는,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는 양들에게 자신을 이입시킨다. 양들은 문을 열어줘도 도망치지 못할 만큼 겁에 질렸다. 한 마리라도 구해주려고 안고 달아났지만, 너무 어리고 약한 자신은 무기력하게 실패했다. 고백하는 내용만으로는 그 양이 도살당할 처지라 짐작되지만 어쩌면 고립된 농장에서 성폭행당하는 소녀들을 암시하거나 클라리스 자신을 암시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된 이 상처를 한니발이 어루만진다. 크로포드 앞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지만 한니발 앞에서는 가난하고 어리숙한 시골 소녀였던 과거를 숨기지 못하고 한순간에 무너졌다. 크로포드가 양육과 규범을 제공하는 아버지라면 한니발은 애증과 공감을 나누는 아버지다.
클라리스의 현재와 과거는 이렇게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그녀가 가진 현실의 목표와 트라우마의 극복은 궤를 같이한다. 버팔로 빌의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던 상원의원의 딸은 새끼 양을 닮은 강아지를 안고 있다. 그녀를 구하는 것은 현실의 피해 여성을 구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다.
클라리스는 결국 목적을 다 이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버팔로 빌보다 더 위험한 한니발 렉터를 세상에 풀어놓는 데 일조했다. 에필로그에서 한니발은 클라리스에게 전화를 걸어서 묻는다. “양들은 비명을 멈췄나?” 이 말은 클라리스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였겠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클라리스는 수사관으로써나 인간으로서 미성숙한 존재고 약자였기에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고, 그 공감대를 바탕으로 정의를 수호할 수 있었다. 양의 울음소리는 순수한 동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클라리스가 추구했던 것은 순수한 정의만은 아니었다. 그는 FBI의 권위를 이용해 지방 보안관실의 덩치 큰 보안관들을 말 몇 마디로 해산시키기도 한다. 그가 자기 ‘정신’을 한니발에게 내주고 대가를 받기로 하는 것은 다음 피해자의 어머니가 상원의원임이 드러난 시점부터다. 상원의원의 딸을 구하기 위해 그녀는 한니발에게 거짓 선처를 먼저 제안하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이렇듯 클라리스의 활약의 바탕에는 분명 세속적 욕망이 결부되어 있다. 이제 임시가 아닌 정식 FBI 신분증을 갖게 된 데다 세상이 주목하는 영웅이 된 클라리스는 더는 약자가 아니다.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욕망했던 크로포드에게 악수를 청할 만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선 클라리스에게서는 양을 구해주고 싶었던 어린 소녀의 순수했던 연민이 영영 사라질 수 있다. 양들이 침묵하게 된 이제 클라리스는 한니발 렉터를 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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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윤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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