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공포영화는 프랑스 익스트림 호러의 정점이라고 평가받는 [마터스:천국을 보는 눈]이다.
비교적 심의가 자유롭다는 프랑스에서도,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불편한 시각적 묘사 때문이 아니라, 스토리 자체의 정서적인 충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터스:천국을 보는 눈]은 잘 만든 영화다. 장르의 경계를 최대한 확장하려고 의도했고, 치밀하게 설계된 시나리오와 두 어린 여배우의 열연에, 군더더기 없는 연출력이 더해져 높은 완성도로 제작 의도를 성취했다. 칸느 영화제의 초청을 받았고, 판타스틱 영화제의 칸느라고 할만한 시체스 영화제 작품상을 받았다.
비인간적인 감금과 학대로부터 탈출한 소녀 루시(밀레느 잠파노이).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그녀는 극심한 대인기피, 악몽, 환각, 자해 등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친절한 소녀 안나는 루시가 마음을 여는 유일한 친구가 되지만, 루시의 자해와 환각은 계속된다. 15년 후, 루시는 자신을 고문한 부부를 찾아내고, 그 집에 찾아가 아이들까지 모두 죽인다. 루시는 감금당했을 당시, 함께 탈출하지 못한 여자의 망령에 시달리며, 그때마다 자신을 자해해왔다. 그 망령이 다시 나타나 루시를 괴롭히자, 루시는 자신의 온몸을 난도질한다. 복수로 마음의 평온을 되찾기는커녕 죄책감과 환각만 커진다. 안나 조차 자신을 믿어주지 않자, 루시는 안나의 눈앞에서 자살한다. 충격과 슬픔이 채 가시기 전, 안나는 이 집의 숨겨진 공간을 발견하고, 고문당하고 있던 또 다른 여자를 구하게 된다. 하지만 범인들이 나타나 안나를 붙잡는데, 그들은 맹목적인 비밀 종교집단이었다. 그들은 희생양에게 인위적 고행을 강제해 순교자(martyr)를 만들려는 목적이라고 한다. 이제 안나가 새로운 희생양이 되고, 순도 100%의 종교적 광기에서 비롯된 폭력이 집요하게 반복된다.
[마터스]는 대단히 불쾌한 영화다. 수위 높은 잔혹함 때문에 불쾌하며, 트라우마, 자해, 죄책감, 좌절, 광기 등 도저히 즐겨지지 않는 마이너스 감정의 홍수 때문에 불쾌하다. 주인공이 결국 악당에게 굴복하기 때문에 불쾌하며, 명쾌한 설명을 주지 않는 열린 결말 때문에 불쾌하다. 기존 호러와 차별성을 강조하는 감독의 오만함이, 이 영화를 숭배하는 팬과 평론가의 지적 허영이, 이 영화에 극단적인 혐오를 보이는 안티팬의 몰지각한 악플이 불쾌하다. 걸작인가 졸작인가를 논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걸작이지만 불쾌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불쾌함은, 정확히 감독이 의도한 바이다.
비슷한 내용의 [호스트]나 [쏘우]같은 영화들과도 다르다. 잔인한 묘사는 많지 않고, 비정상적인 신체 훼손은 극히 드물다. 루시의 학살 도구는 산탄총이고, 깔끔하게 한 발씩 쏴서 죽인다. 살인의 과정 자체를 즐기는 공포영화다운 무기가 아니다. 회상 속 과거의 고문이 얼마나 심했고 어떤 식이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잔인하게 여겨진다. 왜 그럴까?
대개 폭력은 남을 향한다. 영화에서도 그렇다. 관객 대부분은 폭력을 미디어로만 경험하기 때문에, 영화 속 폭력의 외피만을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해는 충격이 다르다. 폭력 자체보다 자해 전후의 심리에 몰입되어 고통이 더 깊게 전해진다. 루시의 불행한 유년기를 아는 관객에게, 그녀의 자해를 보는 것은 견디기 힘들다. [마터스]가 잔인해 보이는 이유는 감정을 먼저 불러낸 다음에 폭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이를 쏘기 직전 루시는 주저하며 묻는다. “너희 부모님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그리고는 눈물을 삼키며 방아쇠를 당긴다. 이는 아이뿐 아니라 루시에게도 잔인한 경험이 된다. 보통의 호러 퀸들은 두려움 때문에 운다. 하지만 안나와 루시는 영화 내내 너무 서럽고, 너무 억울하고, 너무 불쌍하고, 너무 미안해서 운다. 관객이 이 감정을 알고 있다. 게다가 15년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 있다. 잔인함은 이렇듯 스토리에서 비롯된다.
안나가 새 희생양이 되어 감금될 때, 관객은 이미 그녀가 앞으로 당할 극한의 고통을 짐작한다. 그래서 벌써 힘들어하기 시작한다. 안나에 대한 고문은 맨손 구타인데, 아주 수위가 낮은 폭력이지만 너무 현실적이어서 몰입이 된다. 연출도 집요하다. 페이드인, 구타, 페이드아웃을 오간다. 음악도, 대사도 없다. 다시 페이드인, 구타, 페이드아웃. 침묵 속에서 반복될 뿐이다. 15년 전 루시가 겪었을 고통과, 뉴스에서 본 감금 학대 피해자들의 고통까지도 환기된다. 이제는 이 체험이 얼마나 계속될지 모른다는 것이 공포 자체다.
대부분의 영화는 관객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가학과 피학, 선정적 폭력을 통해 극한의 감정을 즐기려는 관객에게 어필하려는 것이 공포영화다. 하지만 [마터스]는 즐길 수 없다. 파스칼 로지에 감독은 그럴 마음이 없다. 관객을 괴롭히는 것, 아연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인 듯 보인다. 그것이 모던 호러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감독은 말한다. 이전에도 파솔리니나 미카엘 하네케, 라스 폰 트리에, 가스파 노에같은 감독들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작들을 만들어 왔다. 그들의 영화는 대중영화라고 보기보다는, 필름을 예술의 재료로 이용한 작가주의 영화라고 분류해야 옳겠다. 비교적 호러라는 장르에 충실한 [마터스]는, 작가주의와 대중영화의 경계에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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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윤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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