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왔다. 열대야를 보내는데 등골 서늘해지는 공포영화만 한 것이 없다. 오늘은 영국의 천재 감독 대니 보일이 만든 독특한 좀비영화, [28일 후]다.
급진적인 환경운동가들이 한 실험실의 침팬지들을 풀어주려 한다. 이를 막으려던 연구원은 침팬지들이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고 경고한다. 풀려난 침팬지는 이들을 공격하고, 물린 사람은 몇 십 초만에 이성을 잃은 채 다른 동료를 공격한다.
28일 후, 한 병원.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청년 짐이 눈을 뜬다. 어디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아 혼란스럽다. 런던 전체가 텅 비어 있다. 겨우 사람을 만났지만 그들은 좀비였고, 짐은 다른 생존자에 의해 겨우 구출된다. 짐은 영국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간 바이러스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된다. 좀비가 된 감염자들 외에 생존자는 거의 남지 않았다. 짐은 셀레나, 프랭크, 해나 등과 함께 맨체스터 인근에 있다는 군부대를 찾아가기로 한다. 하지만 거기서 만난 군대는 겨우 아홉 명이었다. 또한, 군인들이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면서, 좀비보다 비인간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로 돌변한다.
여느 좀비 영화들과 달리 [28일 후]에는 잔혹한 신체 훼손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조지 로메로 이후 대부분 좀비는 ‘살아있는 시체’답게 팔다리가 잘렸거나 내장을 드러낸 채 뻣뻣하게 움직이는 모습이었지만, 대니 보일의 좀비는 사지도 멀쩡하고, 피부도 별로 푸석하지 않다. 이 좀비들은 특히 움직임이 다르다. 이들은 사람을 발견하면 다들 전력질주로 달려드는데, 이 속도감이 주는 공포가 신선했다. 온몸이 불타오르면서도 짐의 뒤를 바싹 쫓던 좀비의 강렬한 모습은, 저예산 B급 영화로만 소비되던 좀비가 낡은 이미지를 벗고, 새로운 감각의 21세기형 텍스트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리하여 [28일 후]는 이후 [새벽의 저주], [나는 전설이다], [월드워 Z] 등 블록버스터급 좀비 영화들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들의 좀비들도 다 빠르다.
[28일 후]에서는 좀비가 사람을 죽이는 묘사는 한 번도 화면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잔혹한 폭력은 오히려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장면에서 나온다. 영화의 시점은 좀비와 사람의 싸움이 이미 사람의 패배로 끝난 후다. 그래서 좀비와 사람의 대립은 설정 이상의 의미가 없고 비중도 적다. 대신 생존자들 간의 대립과 그에 인해 벌어지는 범죄와 살육이 더 중요한, 말하자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밤’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대니 보일은 이 영화에서 인간의 나약하고 잔인한 실체가 최대한 진짜처럼 드러나기를 바랐고, 그래서 다큐멘터리의 요소들을 연출에 도입했다. 중요한 화면 구도나 콘셉트는 세계 각국의 내전, 시위, 재난 현장 등을 취재한 르포 사진들을 참고해서 설계되었다. 에볼라와 광우병에 대한 영국의 공포를 바탕으로 분노 바이러스의 특징이나 그 영향에 대해 연구했다. 실험실의 침팬지들이 폭력적 바이러스를 갖게 된 것은 인간의 폭력에 관한 영상을 강제로 봐야 했기 때문인데, 영화의 처음을 여는 이 영상들은 실제 내전 국가의 기록물을 비롯, 세계 각국의 과격 시위나 폭력 진압의 현장들을 담은 다큐 영상들이고, 연좌 농성 중인 시위대를 곤봉으로 때려가며 진압하는 대한민국 전투경찰도 나온다.
비주얼로도 다큐멘터리의 느낌을 내기 위해, 엔딩 시퀀스를 제외한 영화 전체를 DV 캠코더로 찍었다. 도입부의 텅 빈 런던 장면들을 위해 교통 통제 협조를 받을 수 있었던 시간은 해 뜰 무렵, 한 시간씩 뿐이었다. 다행히 DV 캠코더는 매일 아침 한꺼번에 여섯 대를 동원해도 제작비에 큰 부담이 되지 않아, 그 짧은 시간 동안 필요한 장면들을 모두 찍어낼 수 있었다. 전기가 사라진 도심의 야경을 위해 조명을 일일이 통제하는 대신 데이 포 나잇(낮에 조리개를 적정보다 어둡게 하여 밤처럼 찍는 것)으로 도심의 밤 장면을 찍었다. 필름이라면 어지간해선 낮에 찍은 장면 티가 났겠지만, 디테일이 많이 뭉개지는 DV였기 때문에 더 기묘한 톤이 만들어진 것 같다.
떨어지는 화질 덕분에(?) 좀비나 시체의 분장에 공을 덜 들여도 되었고, 분장에서 자유로워진 좀비들은 더 실감 난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캠코더의 기동력은 빨라진 좀비를 더 효과적으로 찍는 데도 유리했고, 심지어 이 특징을 극대화하기 위해 육상 선수들을 좀비로 캐스팅했다. 또 좀비 장면들은 모두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셔터스피드를 조절해서 찍었다. 그래서 프레임들이 ’스타카토처럼’ 끊어지는 듯 느껴지며, 이런 질감 때문에 불안감이 커진다. 재미있는 것은, 짐이 마지막 사투를 벌일 때도 이 기법을 써서 짐과 좀비를 시각적으로 동일시하게 만드는 효과도 의도했다.
영화에 나온 생존자는 열 네 명뿐이다. 이들은 각자가 처한 대재앙에 대해 다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감염된 동료를 죽이는 결정을 20초 만에 내릴 만큼 단호하다. 누군가는 멸종 위기의 인류에 대해 철학적 해석을 하고, 누군가는 멸종을 막는다는 핑계로 비도덕적인 결정을 내린다. 가장 지배적인 정서는 역시 고립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짐은 처음부터 텅 빈 런던을 혼자 헤맨다. “헬로우?”를 간절히 외치며 사람을 찾아다닌다. 어렵게 동료들을 만난 뒤에도 혼자 남겨지는 악몽을 꾼다. 그렇게 소중하게 얻은 동료를 지키기 위해, 그는 다른 생존자를 사냥하게 된다. 바이러스 없이도 좀비와 같은 잔인함이 가능해진 것이다. 잔인한 묘사 없이도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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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윤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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