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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교실

한니발 렉터의 스크린 데뷔 <맨헌터>

by 꿀마요 2021. 11. 29.


할리우드 영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인 한니발 렉터는 그 엽기적인 식인 행각과 초인적인 지성이 더해진 정신세계로 인해 악마나 흡혈귀 못지않은 공포영화의 아이콘으로 꼽힌다. 오늘의 공포영화는 한니발 렉터가 처음으로 스크린에 등장한 <맨헌터>다.

2003년, 미국 AFI(미국 영화 연구소)는 할리우드 영화 100년 사상 최악의 악역 100명을 선정했다. 1위와 2위는 한니발 렉터와 노먼 베이츠(알프레드 히치콕 <싸이코>)가 차지했다. 둘 다 싸이코패스 살인마다. 이후 10여 년 사이에 이들을 앞지른 악역으로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가 있다. 이들도 싸이코 패스 살인마다. 한국 영화 최악의 악역을 꼽는다면 지영민(<추격자>), 면가(<황해>), 장경철(<악마를 보았다>) 정도를 들 수 있을 텐데, 이들도 다 싸이코패스 살인마다. 이 모든 악당 가운데 최강은 역시 한니발이다. 시리즈를 다섯 편이나 거치면서 끝까지 건재한 악당이기 때문이다.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는 토마스 해리스의 소설 <레드 드래곤>에서 처음 등장했다. <레드 드래곤>은 한 엽기적인 연쇄 살인범을 찾아내려는 FBI 수사관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주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 달러하이드는 주인공인 윌 그레이엄 요원 다음으로 비중이 높다. 중반부 이후에는 그의 배경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레이엄의 수사 과정과 병치 되어 진행된다. 한니발 렉터는 이 첫 번째 작품에서 겨우 열한 페이지만 등장하는 조연이다. <양들의 침묵>과 마찬가지로 감옥에 갇힌 채 미궁에 빠진 수사에 대한 조언을해 주는 역할이고, 이전에 그레이엄과 약간의 악연이 있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관객들에게 한니발 렉터는 <양들의 침묵>에서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맨헌터>에서는 브라이언 콕스가 연기했다. 그는 <엑스맨2>의 윌리엄 스트라이커 대령, <본 아이덴티티>의 CIA 국장 애보트를 연기한 배우다. 안소니 홉킨스가 <양들의 침묵>에서 겨우 16분 남짓의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을 만큼 압도적이긴 했지만, 콕스 또한 짧은 등장만으로 드라마의 상당 부분을 쥐고 흔드는 강렬한 렉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또한 지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는 범죄 심리를 파악하는 그레이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적당히 협조해 주면서도 자신을 체포한 데 대한 노골적인 복수심을 드러낸다. 그레이엄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고, 그와 가족을 위태롭게 만든다. 안소니 홉킨스의 렉터와 다른 점이라면, 인간을 초월한 악마적 카리스마보다는 복수심 같은 다소 유치한 감정을 드러내고, 상대를 가지고 노는 유희적 악행보다 순수한 욕망에 따른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소니 홉킨스만큼 섬뜩한 아우라는 별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맨헌터>에서 그레이엄의 고뇌는 스승이자 숙적인 렉터와의 관계보다 상관인 크로포드를 통해 더 많이 자극받는다. 현장과 증거들에 파묻혀 자신을 범인의 심리에 동화시키는 방식으로 프로파일링 수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그들과 같은 잔인한 본성을 끄집어내게 된다. 렉터에게 당한 물리적 부상보다 그의 끔찍한 범행을 직관적으로 알게 되면서 느낀 악마성이 고뇌의 본질이다. 외면하고 싶은 트라우마를 다시 끄집어내도록 종용하는 것은 법의 정의이고, 수사관으로서의 의무감이며, 이런 가치들을 대변하는 것이 상관이자 동료인 크로포드인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크로포드는 은퇴한 그레이엄에게 도움을 청한다. 크로포드에게 당연히 악의는 없다. 더 많은 피해자를 막고자 하는 바람이 그레이엄과 가족의 희생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레이엄과 크로포드의 전문적인 활약이 영화를 차근차근 끌고 간다. 범인은 보름달이 뜰 때면 한 가족을 몰살시키고, 시체의 눈에 거울 조각을 박아 넣은 엽기적인 살인마다. 범행 간격으로 보아 다음 보름달이 뜰 때 또 다른 가족이 희생될 것이다. 쉽지 않은 수사 과정에 한 파렴치한 기자가 끼어들고, 그의 무분별한 기사 때문에 그레이엄과 가족들이 범인의 타겟이 될 위험에 처한다. 그레이엄은 화가 나지만 이참에 범인을 자극하는 기사를 흘려 미끼가 되기로 한다. 하지만 범인은 그레이엄 대신 기자를 희생시키며 자신을 과시한다.

 


  
이때부터 수사 과정과 범인 달러하이드의 개인사가 교차한다. 그는 구순구개열 기형을 수술한 흉터가 있고, 2m의 키에 대머리로, 외모 콤플렉스가 심하다. 게다가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게 구박받은 트라우마 때문에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하다. 그는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빠져들고, 그의 그림에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묘사된 레드 드래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더 우월한 드래곤으로 진화하고자 엽기 살인을 시작한 것이다. 성장 배경과 왜곡 심리를 분석하는 것은 범인의 윤곽을 파악하는 데도, 다른 범죄를 예방하는 데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악당의 악마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범죄자를 향한 동정심이나 범행에 대한 핑계를 제공하기도 한다. <맨헌터>에서 달러하이드의 불행한 과거 묘사는 원작 소설보다 많이 간략해졌다. 하지만 그레이엄의 심리적 동일시를 통해 어느 정도 동정의 여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범행을 준비하던 그가 시각장애인인 레바(조앤 알렌)를 만나고, 자신의 추한 외모를 보지 못하는 그녀의 관대한 사랑을 받게 되면서 흔들린다. 엽기 살인으로 현실에서 도피하는 대신 레바를 통해 내면의 상처를 위로받고자 하는 살인마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데, 살인마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 이 소설과 영화의 탁월한 점이다. 그는 한니발 렉터를 동경했고 레드 드래곤에 심취했지만, 아직 완전한 악마도, 괴물도 되지 못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나약함이 다시 발목을 잡는다. 사소한 오해는 질투심을 불러일으켰고, 잠깐의 희망은 더 큰 좌절로 변한다. 그는 다시 괴물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그레이엄이 드디어 렉터의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달러하이드를 막기 위해 달려오면서 클라이맥스가 펼쳐진다.

토마스 해리스는 원래 경찰의 범죄 수사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을 했었고, 철저한 자료조사에 기초한 디테일한 글을 쓴다. 한니발 렉터 시리즈 영화 중 원작의 이런 저널리즘 문학의 분위기를 가장 잘 살려낸 작품이 <맨헌터>다. 수사 과정, 특히 증거를 모으고 분석하는 과정이 매우 디테일하고 프로페셔널하다. 원작 소설에 묘사된 것 이상으로 섬세한 상황묘사와 대사가 가득하다. 심지어 크로포드 역의 데니스 파리나를 비롯한 몇몇 배우와 스탭이 경찰이나 군인출신이고, 마이클 만 감독도 범죄 관련 전문지식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고 한다. 범죄자와 수사관들의 프로의식과 숙명적인 대결을 탁월하게 그리는 그의 장기는 이때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셈이다.

마이클 만은 또 달러하이드에 대한 너무 과장된 묘사가 오히려 그의 내면적 고뇌를 약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래서 등에 새긴 문신이나 어린 시절 학대받는 내용 등의 비중을 줄였다. 대신 그레이엄에 관해서 더욱 충실했다. 직업적 의무와 가족의 평화 사이에서 고민하며 원치 않는 내면의 추악함을 계속 대면해야 하는 그레이엄은 달러하이드가 토해 놓은 광기와 렉터의 악의에 찬 이중성까지 받아들이느라 지칠 대로 지쳐간다. 그레이엄은 비정상적 욕망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면서 상처받는 누아르의 고독한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그의 이상향은 가족이 기다리는 푸른 바닷가에 있다. 하지만 그가 다녀야 하는 건물 안팎은 대부분 흰색이다. 사건 현장도, FBI 내부 시설과 과학 수사실의 집기들, 실험기구들마저 흰색이다. 렉터가 갇혀있는 감방도 온통 흰색인데, 심지어 정교하게 쪼개 찍은 그레이엄과 렉터의 대화씬을 보면 둘 중 누구를 찍고 있어도 가운데 창살의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온통 흰 정신병원과 같은 도시의 감옥에는 렉터뿐 아니라 그레이엄 자신도 갇혀 있는 셈이다. 후에 격자 모양의 달러하이드의 집 창문을 깨고 뛰어들고, 또 얼굴에 다시 범인의 칼을 맞는 장면은 자신을 가두고 있던 감옥을 스스로 부수고 과거의 트라우마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상징한다. 영광의 상처를 얻은 채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모습도 누아르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맨헌터>가 제작되던 무렵, 극장가에서는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이어 오브 드래곤>이 흥행에 참패한다.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는 원작 <레드 드래곤>의 제목을 그대로 쓸 경우 불운이 따라올까 싶어 영화의 제목을 <맨헌터>로 바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맨헌터>의 흥행 결과도 부진해진다. 드 로렌티스는 실망한 나머지 2년 뒤에 나온 <양들의 침묵>의 판권을 양보한다. 그런데 영화 <양들의 침묵>이 크게 성공하자 드 로렌티스는 다시 이후 소설들의 판권을 사들였고, 2001년 <한니발>의 영화화에 이어 2002년에는 다시 <레드 드래곤>을 리메이크하는 고집스러운 선택을 한다.

이 새로운 <레드 드래곤>은 달러하이드의 묘사 같은 원작의 이야기 요소들을 최대한 살려 내는 데 중점을 두었고, 비주얼 면에서는 성공했던 전작 <양들의 침묵>의 고딕 양식을 이어받는다. 특히 원작보다 대폭 늘어난 한니발 렉터 장면들을 내세워 크게 흥행했다. 하지만 많은 내용을 빽빽하게 담느라 안정감만 추구한 연출은 심심하고, 렉터와 달러하이드가 활약하는 만큼 에드워드 노튼이 연기한 그레이엄은 무기력한 느낌이다. <맨헌터>는 <양들의 침묵> 이후의 한니발 렉터 시리즈들과 비교되면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영화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렉터보다 그레이엄 비중이 훨씬 큰 것도 나름 원작에 충실했던 결과이며, 배우들의 연기도 결코 2002년 작품에 못 미친다고 할 수 없다. 군더더기 없는 드라마 각색과 완급조절은 흠잡을 데가 없다. 특히 이 영화에서부터 드러난 마이클 만 특유의 운명론이나 절제되고 선 굵은 연출 스타일은 이후 그의 영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들이 되었다. <히트>나 <콜래트럴> 같은 대표작들이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맨헌터>의 존재가 필연적이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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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윤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