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왔다. 열대야를 보내는 데 등골 서늘해지는 공포영화만 한 것이 없다. 오늘은 공포보다 멜로라는 수식이 더 어울리는 아름다운 공포영화, [기담] 이다.
의사들이 연애하는 이야기 제외하면, 병원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대부분은 공포물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병원만큼 죽음과 밀접한 공간은 없기 때문이다. 1942년 경성의 한 병원을 배경으로 한 [기담]은 몇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세 가지 이야기를 그린 옴니버스 공포물인데, 대개의 공포영화보다 멜로드라마적인 정서가 강하다는 특징이 도드라진다.
소심하고 섬세한 의대생 정남(진구)은 이름 모를 여고생의 시체에 점점 빠져든다. 그녀의 불멸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 어느 날, 그녀를 위한 영혼결혼식이 은밀히 거행되는데, 정남은 자신이 그 영혼의 짝이 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네 사람이 죽은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은 소녀(고주연). 사고로 죽은 엄마와 다른 희생자들이 사고 당시의 끔찍한 몰골로 밤마다 소녀를 찾아와 고통받는다. 담당 의사는 심리치료를 통해 소녀의 죄의식을 덜어주고자 애쓰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소녀의 진실은 평범하지 않다.
김선생(김태우)은 아내(김보경)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1년 전에 죽었다. 요즘 주변에서 일어난 연쇄살인도 아내의 짓임을 알게 되었다. 냉정하게 따져보니 범인은 죽은 아내가 아니라, 아내에 빙의된 나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각각의 이야기는 심플하지만 매력적이다. 세 가지 사건 모두 신선한 도덕적 충격을 주는데, 감정을 일관되게 쌓아 충분히 공감할만한 이야기로 빚어졌다. 그래서 비록 공포의 자극이 세지 않아도, 속 깊은 맛이 우러난다. 원래 연출을 하기로 했던 박진성, 박진석 감독의 2005년 시놉시스를 보면, 2년 후 정가 형제의 완성작에 담긴 이야기와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가 형제는 원작의 드라마를 장편 스케일로 확장하거나 참신한 공포 연출을 위한 잔재주보다 각 단편 에피소드의 개연성을 높이고, 그 안에서 포착된 [기담] 고유의 정서를 완성도 있게 표현하는 데 주목한 것 같다.
공포인 듯 공포 아닌 공포 같은 [기담] 만의 고유한 정서는, 세 이야기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특히 그 사랑이 집착으로 발전하여 파국을 낳고, 후회로 이어지는 비극적 구성에서 [기담]의 밀도 있는 공포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절정에는 말초 신경의 자극보다 시적으로 표현된 처연한 아름다움이 더 어울린다. 복도 거울 앞에 귀신과 나란히 선 상황, 등 뒤로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그 어두운 복도가 아름다운 눈길과 겹쳐지는 묘한 판타지로 빠진다. 끔찍한 교통사고의 순간, [기담]은 살점이 튀고 뼈가 부서지는 묘사 대신, 풍경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아득한 현기증을 슬로모션으로 보여준다. 특히 영혼결혼식 도중 시체 보관함 안으로 끌려간 정남이 겪는 판타지가 주목할만하다. 부부의 일생을, 4계절의 풍경을 가진 네 개의 연속된 방으로 묘사한 이 아름다운 시퀀스는 두고두고 회자할만한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장면이 아무리 많아도, 무서운 장면이 적다는 것은 공포영화를 공포영화로 보는 팬들에게는 큰 단점이 된다. 그런데 정작 [기담]을 높이 평가하는 팬들 대다수는 이 영화가 자신이 가장 무섭게 본 영화 중 하나라고 한다. 특히 이 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포털에서 [기담]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연관검색어가 '기담 엄마 귀신'인데 이 엄마, 무서워도 너무 무섭다. 넉넉한 사이즈의 화면에 평범한 피칠갑 분장으로 가만히 앉아있는 주제에 [링]의 사다코를 비롯하여 [주온], [셔터], [장화홍련] 등의 귀신들이 보여준 아크로바틱한 몸짓들이 범접 못 할 기괴함을 뿜어낸다. 분장 외에는 아무런 기술적 효과 없이, 오로지 연기만으로 뽑아낸 기괴함이라는 것이 대단하다. 엄마 귀신을 연기한 박지아의 방언 연기도 명불허전이지만, 보는 사람도 탈진하게 하는 아역 고주연의 열연이야말로 이 장면뿐 아니라 영화 전체의 몰입도를 극대화한 일등 공신이다. 이 장면을 제대로 즐기려면 반드시 소리를 들어야 하고, 심신 미약자는 제발 부탁이니 절대로 클릭하지 마시라.
기획단계부터 완성까지 4년이나 걸렸다. 김태우 외에는 스타급 배우도 없어 투자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공들여야 할 미술을 감안하면 겨우 마련된 28억의 제작비는 빠듯했을 것으로 보인다. 개봉 당시 [디 워], [화려한 휴가] 등이 스크린을 장악해서 첫 주부터 교차 상영 등 편법으로 상영되며 겨우 68만 명의 관객이 보는 데 그쳤다. 하지만 당시에도 입소문이 자자해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기담]의 '상영관 수 늘이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영평상 신인감독 상이나 청룡영화제 촬영상, 미술상 등을 받아 웰메이드 공포영화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수상 때문이 아니라도 이 영화가 보여준 미학적, 기술적 성취와 독특한 창의성은 높이 살 만하다. 제작자와 감독들의 뚝심 덕분에 장점이 많은 아름다운 영화가 나왔고, 많은 팬이 [장화, 홍련],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알포인트] 등 한국의 대표적인 공포영화들과 [기담]을 나란히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글쓴이 윤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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