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히 떨어진 기온보다 더 서늘한 공포영화들을 찾아본다. 오늘은 오래도록 숨겨져 있던 80년대 한국 공포영화의 수작 <깊은 밤 갑자기>다.
선희(김영애)는 30대 주부다. 남편(윤일봉)은 생물학 교수로 나비 채집 때문에 지방 출장이 많다. 하루는 출장 갔던 남편이 젊은 가정부 미옥(이기선)을 데려온다. 가정부가 필요했던 선희는 미옥을 반긴다. 하지만 이내 이 젊고 예쁜 아이가 남편의 애인일 수도 있다는 불안이 싹튼다. 특히 전에 남편의 나비 사진들 틈에서 본 무녀 형상의 목각인형이 미옥의 짐에서 실물로 발견되자 선희는 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심한 현기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환각인지 실제인지 몰라도 선희는 남편과 미옥의 신음을 듣거나 심지어 둘이 나체로 엉켜있는 것을 문틈으로 본 것 같다. 남편의 물건이 미옥 방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남편은 모두 선희의 망상이라며 정신 감정을 권한다. 선희의 불안은 점점 심해져 나중엔 미옥이 저지르는 실수도 자기를 죽이려는 행동이라 여기게 되고, 결국 사고를 가장해 미옥을 죽인다. 남아 있는 미옥의 인형은 더욱 두렵다. 멀리 던져 버리거나 돌에 묶어 연못에 가라앉혀도 무슨 조화인지 집에 돌아와 있는 인형에 선희는 치가 떨린다.
어느 날 남편과 아이는 집을 비우고, 들르겠다던 친구도 폭풍으로 발이 묶인 밤, 선희는 인형과 단둘이 집에 남게 된다. 정전이 되고 집안이 어두워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인형. 사람 크기로 커져서 작두를 휘두르며 선희에게 달려드는 이 목각인형에 죽은 미옥의 모습까지 겹친다. 선희는 악령인지 원귀인지 죄책감이 만든 허상인지 모를 존재와 집안에서 밤새 사투를 벌인다.
고 고영남 감독의 영화 <깊은 밤 갑자기>는 81년 개봉 당시에는 서울 관객 3만 명 정도로 거의 흥행하지 못하고 이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영화다. 하지만 80년대 말 MBC 주말의 영화에서 납량특집으로 한국 공포영화 시리즈를 방영했을 때, 이혁수 감독의 <여곡성>과 함께 <깊은 밤 갑자기>가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이후 비디오 대여점이 급증하고, 씨네필들 사이에서 B급 장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이 영화들은 한국 공포영화의 숨겨진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20세기, 특히 1980년대까지 한국 공포영화의 주류는 <월하의 공동묘지>로 대표되는 한 맺힌 여자 귀신이나 구미호로 대표되는 민담에 관한 것이었다. 90년대 들어 고 김기영 감독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면서 <하녀>가 언급되기 전까지 한국 영화에서 현대적인 심리 스릴러 장르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중산층 가정에 가정부(하녀)로 들어온 젊은 여자와 관련된 사건들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불안증, 집착, 신경쇠약같은 이상 심리나 환상, 악몽 같은 부조리한 상황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깊은 밤 갑자기>와 <하녀>는 많이 닮았다.
다만 <하녀>는 주인 남자의 부도덕한 외도, 그로 인해 아이를 갖게 된 백치 하녀의 집착,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려는 아내 등 갈등의 원인이 뚜렷한데 비해, <깊은 밤 갑자기>는 모든 갈등이 아내의 망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다르다. <하녀>의 하녀와 아내는 둘 다 자신의 자식을 지키기 위해 가장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들이 다투는 것은 모권(母權) 때문이다. <깊은 밤 갑자기>의 아내는 남편의 성적 관심이 자기 대신 열아홉 살 미옥에게 향할까 봐 두렵다. 즉 선희의 싸움은 중년 여성이 성적 쾌락에 대한 권리를 찾으려는 행위이다.
미옥의 젊고 아름다운 몸은 선희에게 경계의 대상이지만 정작 그 몸에 집착하는 것은 남편이 아니라 선희다. 샤워를 낯설어하는 미옥을 씻겨주면서 본 그녀의 몸에 대한 감탄을 남편에게 거듭 얘기한다. 선희의 표현을 빌자면 “여자가 봐도 황홀해질 만큼 아름다운 육체”라고 하는 미옥의 몸은 꽤 적나라하게 나온다. 미옥 역의 이기선은<깊은 밤 갑자기>가 두 번째 영화로 신인이나 다름없었고, 심지어 촬영 당시 갓 스무 살이 된 어린 배우였지만 과감한 노출을 감행했다. 그는 순진함과 경박함, 야성의 관능이 뒤섞인 시골 소녀의 묘한 매력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물건을 꺼내다 옷 단추가 뜯어져 가슴골이 드러나거나, 겁 없이 2층 창문을 닦느라 아래층에서 팬티가 보이는데, 이처럼 무심한 순간에 무방비로 보이는 속살이 교양있는 정숙한 여자인 선희에게는 낯선 자극이고, 위협이 되는 것이다.
미옥이 오기 전에도 선희는 남편이 부부관계보다 희귀종 나비 채집에 더 몰두하는 데 불만을 드러낸 바 있다. 나비 표본과 집안 가득한 각종 박제는 남편이 가진 일종의 페티시즘일 수도 있는데, 선희는 마지막 10분간 목각인형(허상)과의 사투를 벌이는 동안 그 모든 것을 때려 부숨으로써 자신의 억압된 성적 욕망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 모든 것을 제거하고 난 선희의 모습은 그토록 꺼리던 목각인형(미옥)과 똑같은데, 선희는 자신보다 우월한 미옥의 육체를 질투하면서 동시에 그 몸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선희의 시점으로만 진행된다. 그래서 남편과 미옥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알 수가 없다. 선희가 포착하는 외도의 여러 가지 증거에 대해 둘은 변명으로 피해가기만 하고, 실제 그들의 관계가 어떠하며 누구의 주장이 사실인지 영화는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추리물의 특성을 취하고도 해답은 없는 이 모호함은 선희의 심리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었겠으나 결과적으로 드라마를 허술하게 만들기도 한다. 망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표현하기 위해 감독은 화면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킨다. 이를 위해 렌즈 앞에 컵을 대거나 삼각형 거울 조각을 이용해 모자이크된 화면을 이용하는데, 효과적이긴 해도 너무 빈번해서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단점이 거슬리지 않을 만큼 <깊은 밤 갑자기>는 충분히 밀도 높은 공포영화다. 기존 공포영화의 전통을 탈피한 참신한 사이코 스릴러이고, 여주인공의 심리만으로 이야기를 일관되게 끌고 간 솜씨도 뛰어나다. 복잡한 선희의 정신상태를 디테일하게 표현하면서 관객을 몰입시키는 김영애의 열연은 단연 돋보인다. 이기선의 노출도 볼거리를 위한 양념으로만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주제와 감정에 맞게 드러나고 있다. 누드가 많아 주요 장면 상당 부분이 삭제된 채 방영된 공중파에서도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고, 낡은 비디오 화질로도 많은 매니아층을 만들어 낸 강렬한 영화다. 전 세대의 낡은 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젊은 관객도 충분히 즐길만한 영화다. 관객이 영화에 관대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한국 고전 영화를 대할 때는 약간의 관용이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특수효과의 조악함이 정 거슬린다면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고 보자. 그게 더 재미있게 영화를 즐기는 방법일 수도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https://www.koreafilm.or.kr) 또는 유튜브 한국 고전영화극장(http://www.youtube.com/user/KoreanFilm) 등의 사이트를 통해 온라인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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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윤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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