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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스타 비하인드

<1987>, <살인의 추억>, <해무>, <강남 1970>의 그 남자, 유승목

by 꿀마요 2021. 11. 30.


 
 <강남 1970>은 강남 개발 이면의 복잡한 사정을 치밀하게 다룬다. 이민호와 김래원 외에도 정치가, 깡패 두목 등의 조연들이 스토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다. 이 주요 배역들 가운데, 특히 거칠고 비열한 야심가 서태곤을 연기해 호평받고 있는 배우 유승목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유승목은 1969년생으로 <강남 1970>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 태어났다. 그는 영화배우가 꿈이었지만 첫 입시에서 연극영화과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재수 때는 축산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는데, 연극 동아리에 가입해 원하던 연기를 시작했다. 그는 1993년 극단 가교의 단원이 되어 프로 배우의 길을 걸었다. 연극배우로 자리를 잡고 꾸준히 공연에 출연하고 있었으면서도 연기에 대한 마음은 더 커지기만 했다. 그는 연기에 더욱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1998년 늦깎이로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편입했고, 대학원 과정까지 수료했다.

 

1987

대학 선후배들과 함께 여러 편의 단편영화 작업을 하며 스크린 연기를 시작한 그는, 1999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 캐스팅되며 장편영화 데뷔의 기회를 얻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설경구의 동료 부대원 임 일병이었고, 광주가 고향이라고 하는 대사 연기도 있었다. 하지만 광주 시퀀스의 촬영 기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그의 졸업공연 일정과 겹치게 되었고, 그는 부득이하게 중도 하차하게 되었다. 결국 이 영화에서의 유승목의 모습은 엔딩 크레딧으로만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2002년 <굳세어라, 금순아>의 단역이 실질적인 장편 데뷔작이 되었다.

그의 연기를 영화 팬들에게 각인시킨 최초의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었다. 그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살인의 추억> 배우 오디션 공고를 봤다. 프로필을 보내고 나서야 응모 기간이 이미 한참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아직 적당한 배역이 남았으니 오디션을 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단역 배우 캐스팅에도 꼼꼼하게 공을 들인 봉준호 감독의 성격이 그에게 기회가 된 것이다.

 

이미지 = 영화 <살인의 추억>

 

그렇게 해서 유승목이 맡은 배역은 ‘박 기자’ 역할이었다. 지역 신문의 기자로 기삿거리 하나 건지려고 경찰서를 하도 드나들어서 박두만(송강호)으로부터 ‘빠꼼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오버 사이즈의 정장에 잠자리테 안경을 쓰고 경찰들에게 유들유들하게 친한척하던, 용의자 검거 기념사진을 찍자며 계단 앞에서 포즈를 취하게 하던 그 기자가 바로 유승목이다. <살인의 추억>의 흥행과 더불어 조연 연기자들도 대부분 주목받았다. 유승목이 연기한 박 기자 역시 실제 기자를 데려다 연기시킨 것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호평받았다.

<살인의 추억> 이후 유승목은 <마지막 늑대>, <웰컴 투 동막골>, <외출> 등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단편영화 작업도 계속했다. 특히 이하 감독의 2003년 작품 <1호선>이 서울독립영화제 우수상,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미쟝센 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독립영화계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이하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과 2010년작 <집 나온 남자들>에도 출연하며 우정을 이어갔다.

 

이미지= 영화 <마지막 늑대>(좌), <적의사과>(우)


유승목의 연기를 신뢰하여 두 작품 이상 함께하는 감독들은 이하 감독 말고도 많다. 2007년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단편 <적의 사과>의 이수진 감독과의 인연은 <한공주>의 공주 아빠 역할로 이어졌고, 2011년 독립영화 <짐승의 끝>으로 유승목과 작업한 조성희 감독은 상업영화 데뷔작 <늑대소년>에서도 유승목을 캐스팅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도 <외출>과 <행복>에 연달아 출연했으며, 신태라 감독의 <검은 집>은 <7급 공무원>으로 이어졌다.

봉준호 감독 또한 유승목에 대한 신뢰를 이어간 감독으로, <살인의 추억>에 이어 <괴물>에서도 유승목에게 작은 역할을 맡겼다. 세 번째 인연은 유승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승목은 연극 2001년 태창호 사건을 소재로 2008년 연극 <해무>를 감명깊게 본 유승목은 언젠가 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3년 봉준호 감독이 <해무>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어 먼저 연락을 했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심성보 감독)이 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미안하다고 했지만, 결국 <해무> 제작진은 유승목을 선택했다.

 

이미지=영화 <해무>

봉준호 감독이 제작하고 <살인의 추억>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심성보 감독이 연출한 영화 <해무>에서 유승목은 여섯 주인공 중 한 명인 경구 역을 맡아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파마머리에 청-청 패션으로 촌스러운 멋을 부리고, 돈 욕심과 여자 욕심을 숨기지 않는 경구는 급하고 직선적인 성격탓에 영화 후반부 위협적인 존재로 변해간다. 하지만 양심과 욕망의 극단이 부딪치며 흔들리는 배 위에서 가장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시나리오에서 경구는 영화보다 훨씬 거친 인물로 그려져 있었지만 유승목은 이 캐릭터를 자잘한 약점이 많은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리얼리티를 극대화시켰다. <해무>는 역대 어떤 한국영화보다도 출연 배우들의 앙상블이 돋보인 영화로 평가받는데, 여섯 선원들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낮았던 유승목은 그 가운데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2014년 <한공주>와 <해무>로 배우 인생 20년 중 가장 화려한 한 해를 보낸 유승목은 2015년의 시작을 <강남 1970>으로 열었다. 강남 땅을 둘러싼 전쟁의 배후에는 부패한 정권이 있었다. 이민호와 김래원이 연기하는 두 주인공도 결국은 장기판 위의 말일 뿐, 주된 사건을 일으키고 끌고 나가는 것은 정치가들이었다. 특히 유승목이 연기한 서태곤이라는 인물은 3년 전 정치 공작의 실패에 책임을 지고 내려 놓았던 권력을 되찾기 위해 혈안이 된 캐릭터로, 그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다시 써도 좋을 만큼 드라마틱한 행보를 보인다.


  그는 군인이었을 때는 탱크를 몰고 쿠데타에 앞장선 공으로 여당의 의원직을 얻었고, 조직 폭력배들과 결탁하여 재물을 모으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 온갖 비열한 수단들을 동원했다. 전우이자 동지였던 박 의원에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하들을 가차 없이 제거하는 야비한 짓을 서슴치 않는다. 유승목은 이런 거친 사내 서태곤을 연기하기 위해 체중도 약 5Kg 늘이고, 직설적인 경상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려고 MP3 파일을 수시로 들으며 대사 연습을 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광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고함을 질러대는 대사들에서도 그의 사투리는 자연스럽게 들린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있다. <강남 1970>의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현재까지 살아남은 서태곤을 보면 저 말은 비아냥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인물을 연기한 배우 유승목에게는 저 말을 긍정적인 뉘앙스로 적용할 수 있다. 그는 20년 이상 배우라는 한 길을 걸어오면서 꾸준한 열정으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강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거듭 증명하고 있다. 2015년의 첫 달이 끝나가는 현재, 한국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라이징 스타는 마흔 일곱 살이 된 유승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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