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막바지인 1972년. 한국군이주둔한나트랑인근의 작전 지역 알 포인트(R-point)는 아군도, 적군도, 주민도 존재하지 않는 빈 땅이다. 그런데 6개월 전 그곳에서 실종된 수색대원 들이 본부로 무전을 보내온다. 무전은 살려달라는 비명과 총격전 소리로 끝이 난다. 이에 한국군은 ‘두더지 셋’이라는 임시수색팀을 알 포인트로 보내 일주일간 실종군인들의 흔적을 조사하게 한다.
알 포인트로 가는 길목에서 혼자서 저항하던 여성 게릴라를 제압한 것 외에 베트콩의 흔적은보이지않는다. 다만, 너무 짙은 안개와 터지지 않는 무전기, 이 지역의 비극적인 역사를 반영한 비석과 사원, 가끔 들른다는 미군이 남긴 의미심장한 얘기 등이 대원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3일째 아침 정 일병 이목이 잘린 채 건물 벽에 매달린 시체로 발견되고, 조 상병과 갈등하던 오 병장이 부비트랩에 의해 죽으면서 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임무를 마치고떠나고싶어한다. 저마다 환상을 보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며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그럴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알 포인트> 의줄거리를요약하자면, 전쟁 중임 무를 수행하던 소수의 병력이 적군이 아닌 초자연적 현상(존재)에의해 고립 되어 하나 둘씩 죽어간다는이야기다. 이는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상상력은 아니다. 2년 앞서 나온 영국 영화<데 스위치>(2002)도 1차대전 중 시체가 가득 한참 호에 고립된 영국 군소 대원들이 악령에 얽혀서로 살인극을 벌이는이야기였고, 공포소설의 대가 H.P. 러브 크래프트를 비롯한 여러 소설가가 이미 19세기부터 전쟁터에서 악령을 만나는이야기들을발표해왔다. <알 포인트> 가 다른 작품들과 다른점은, 귀신(악령)의 존재 이유나 공포를 묘사하는 방식에 녹아있는<알포인트> 만의 의미를 통해찾아봐야한다.
알 포인트 일대는 원래 호수였으나, 중국 점령군이 주민들을 학살해 수장한 이후 호수를 메워 생긴 땅이다. 그리고 그들을 기리는 사원을 세웠다. 알 포인트 입구에는 ‘손에 피를 묻힌 자, 불귀(不歸: 돌아가지 못한다)’라고 하는 한 맺힌 비문도 적혀 있다. 중국인들이 떠난 이곳을 이번에는 프랑스가 식민지로 삼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마을 소녀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여유롭던 알포인트 휴양소의 프랑스군은 한날 한시에 몰살 당했다. 그리고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시작한 미군들이 알포인트에 들어왔지만, 역시 숲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6개월 전의 한국군 수색대 역시 죽었다. 그들의 죽음도 원인을 밝히기 어렵다. 그리고 이제 최 중위(감우성)가 이끄는 소대마저 전멸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렇듯 알 포인트에서는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영화<알포인트>에는 많은 귀신들이 나온다. 미군의 유령들과 실종된 수색대의 유령들이 활보하며대원들을계속혼란스럽게한다. 프랑스군의 유령들은 밤마다 무전기로 말을 걸어온다. 어떤 귀신인지는 모르나 계속 대원들을 살피는시선이있다.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오자이를 입은처녀인데, 영화 초반 숲에서 총격전을 벌였던 그녀이기도, 어쩌면 프랑스군이 남긴 사진에 찍힌 그녀이기도하다.
그녀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보다, 그녀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녀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희생된 약자의대표자일것이다. 적어도 이때까지 전쟁은 대부분남자들에의해치러졌다. 그리고 그녀는 제복을 입고 무기를 든 남성의폭력에희생된약소민족의여자다. 영화 초반 최 중위와 김 일병이 사창가를 찾고, 그곳에서 여자 베트콩이 김 일병을 죽이는 사건을 배치했고, 최 중위를 따라 알 포인트로 온 일곱 병사들을다름아닌 성병 환자로 설정한 것은 의미 심장하다.
이들이 제일 처음 죽이는(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사람도 여자다. 벙커의 다른 시체 상태로 보아 그녀는 꽤 오랫동안혼자서그 벙커를 지켜왔다. 그녀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외로운 싸움을 해왔는지는 알수 없다. 다만 그녀의 입장에서 한국군은 그녀의 세상을짓밟는가해자다. 이 이야기를 위해서 한국군이나 미군이 베트남전의 일방적인 가해자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를 핑계로 저지른 폭력과 착취는 결코 용서받아서도 안되고, 아무리 정당방위에 의한 폭력이라 해도 이를 자랑스러워해선 안되는 것이다.
그럼, 가해자의 책임 때문에 알 포인트의 제물이 된 한국군들은 누구인가? 애초에 이들이 베트남까지 가서 싸운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이들일 포인트 임무에 자원하는 이유를 영화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들은 성병에 걸려 귀국이 연기된 병사들이었다. 그런데 군대는 이들에게 일주일 임무만 마치면 곧장 귀국시켜준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들은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아, 내와 딸이 보고 싶고, 엄마에게 소를 사주고 싶은 청년들이었다.
영화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귀신인 실종 부대원의 철모에는 ‘정숙아 기다려라’라고 적혀있다. 베트남에서 몇 달 혹은 몇 년을 보내면서 그들 안에서 가장 크게 자라난 것은 그리움이다. 그런데 귀국을 겨우 일주일 앞두고 손에 묻은 피 때문에 불귀의 몸이 되었다. 이들은 귀신의 총구 앞에 엎드려 자신이 정말 죽어 마땅한지 물어본다.
귀신은 ‘정말 그럴까?’라고 되묻고는 방아쇠를 당긴다. 이들의 방망이 남행을 결정한 권력자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면, 무슨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알 포인트> 가 만들어지던 무렵, 대한민국 국회는 이라크파병동의안을 통과시켰다. 국가가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는 명분은 개인이 감당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닐 것이다.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일부로써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희생되는 것은 개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개인의 죽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알 포인트에서 생긴 여덟 사람의 죽음에서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군인들은 계속 손에 피를 묻히게 되고, 희생자의 원한은 늘어만 간다. 영화 속을 포인트에서는 똑같은 비극이 반복되어왔다. 개인에게 전쟁은 비극이다. 반복된 비극을 또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다. <알 포인트> 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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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윤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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