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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K 드라마 & 예능

오로라 공주, 한국 막장 드라마의 기괴한 실험실

by 꿀마요 2021. 11. 24.

 


포털에서 소개하는 MBC 일일 드라마 <오로라 공주>의 스토리는 ‘대기업 일가 고명딸 오로라가 누나 셋과 함께 사는 완벽하지만 까칠한 소설가 황마마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당돌하고도 순수한 사랑 이야기’란다. 

세상에, ‘순수한 사랑’이야기라니. 

일단 변희봉이 유체이탈을 한다. 정력에 좋다는 이유로 박영규가 치마를 입는다. 키우는 개의 사주를 본다. 동성커플이 야릇한 춤을 롱테이크로 춘다. 중년의 누나 셋이 30대 남동생이 잠들 때까지 침대를 둘러싸고 매일 기도를 한다. 단, 기독교식 기도와 불교식 기도를 섞어서.  

 


  
물론, 유체이탈이나 동성커플이 도덕적으로 잘 못 된 소재는 아니다. 다만 대한민국의 저녁시간에  아슬아슬한 표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방영되고 있는 현상이 흥미로울 뿐이다. 말하자면 전국민이 컬트영화를 매일 밥상머리에서 보고 있는 꼴이다. 막장드라마는 이미 고유명사가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오로라 공주>는 원조 막장드라마 <왕꽃 선녀님>을 집필한 임성한 작가의 위엄이 회를 거듭할 수록 더 해 가고 있다. 

이런 자극적인 소재들은 곧장 보도자료화 되어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간다. ‘동성애’, ‘유체이탈’등 키워드가 워낙 쎄다보니, 보도자료 쓰기도 편하다. 내용보다는 보도자료와 키워드를 만들기 위한 드라마로 보일정도다. 요리는 없고 향신료만 숟가락으로 퍼먹는 느낌이랄까.  시청룰만 좋게 만들면 뭐든 OK 인 것이다. 


그러나, 임성한 작가가 의도 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막장 드라마 <오로라 공주>는 분명 다양한 시도가 끓어 넘치는 드라마 실험실이라 할 수 있다. 속 마음이 만화처럼 말풍선으로 뜬다거나, 경쟁작 <못난이 주의보>를 대놓고 디스하는 대사들은 분명 대한민국 드라마 제작환경 안팎으로 크고 작은 화두를 던진다. ‘중독성 있다.’ 부터 ‘도저히 못 봐주겠다.’까지 보는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 것도 재밌다. 사람들은 과연 일일 드라마로서의 <오로라 공주>를 어디까지 즐길 수 있을까. 혹은, 견딜 수 있을까.

 

동경방랑자

 

유사한 예로 70~80년대 일본의 니카츠 '로망 포르노'라는 장르가 있다.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의 ‘시청률만 좋으면 뭐든 OK’와 비슷한 기조로, 니카츠 프로덕션의 제작방침은 오직 ‘적당히 벗기만 하면 뭐든 OK’였다. 말그대로 적당히 야한 장면만 넣으면 영화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었다. 젊고 실험적인 감독들이 니카츠로 모여들었고, 이후 <사랑의 사기꾼>, <분홍빛 신체검사>, < OL백합족 19살>등 제목만으로 이미 ‘로망’하고 '포르노'한 문제작들이 17년간 1133편이나 쏟아져 나왔다. 때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경시청으로부터 기소를 당하기도 하고, 완성된 대부분은 보잘 것 없는 B급 성인영화였지만, 영화사적으로 의미있는 작품들도 많았다. 훗날 명장이 된 모리타 요시미츠, 히가시 요이치등이 모두 니카츠 출신들이다. 특히 <동경방랑자>를 만든 일본영화의 괴인 스즈키 세이준과 <피와 뼈>의 제일교포 감독 최양일도 니카츠에 몸 담았던 적이 있다. 

동경 방랑자

니카츠 로망 포르노는 예전 작품들 중 <아파트 와이프 정오의 정사>와 <뒤에서 앞에서>등이 리메이크 되면서 아직까지도 재조명 되고 있는 영화사적 키워드다. 국내외 영화제에서도 심심치 않게 특별전이 열리곤 한다. 경영난에서 시작된 니카츠 프로덕션의 제작방침은 일본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현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임성한 작가에서 시작 된 한국의 ‘막장 드라마’도 우리의 문화현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장르다. 지구촌 최고의 인터넷 속도, 웬만한 자극에는 꿈쩍도 안하는 대중, 시청률에 의해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제작환경. 이 모든 문화적 인프라와 사회현상이 만든 것이 막장드라마다. 

작품의 옳고 그르고는 잠시 접어두고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이 흥미로운 괴물이 앞으로 또 어떤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펼쳐나갈지 기대 해 본다. 

 

글쓴이 안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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