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악당은 시실리안 마피아의 품격을 그대로 보여준 [트루 로맨스]의 빈센조 코코티다.
조직의 마약을 들고 도망간 클라렌스(클레스찬 슬레이터)를 잡기 위해, 이탈리아 시실리안 마피아 블루 루의 고문 ‘빈센조 코코티(크리스토퍼 월켄)’는 부하들과 클라렌스의 아버지 클리포드(데니스 호퍼)를 찾아간다. 간결하게 소개하고, 효과적으로 협박하는 빈센조. 상대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오버코트를 얌전하게 벗어두고, 역시 간결하고 매운 편치를 한방. 코피가 터진 클리포드에게 우아한 실크 손수건을 건넨다. 빈센조 코코티는 쓸데없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범죄의 프로, 순도 100% 시실리안 마피아다.
부하를 시켜 클리포드의 손바닥에 칼질을 하고 난 다음, 다시 협박을 이어간다. “시실리인은 타고난 거짓말쟁이지. 그중에서도 우리 아버지는 거짓말의 대가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거짓말할 때 남자가 하는 행동 17가지를 배웠어. 난 네가 훤히 보인다. 말해라. 클라렌스는 어디로 갔지?” 그의 단단한 말투에 공기가 얼어붙는다. 죽음을 직감한 클리포드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헤 생애 마지막 용기를 짜낸다. 그는 근사한 역사적 근거를 들어 이탈리아인이 모두 흑인의 후예라며 도발한다. 혈족에 대한 자긍심을 근간으로 하는 시실리안 마피아에게 최악의 모욕이 쏟아지는 동안, 빈센조의 얼굴에는 야릇한 웃음이 번졌다. 상대보다 자신이 강하다는 확신, 그리고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은 악마적 자존심. 급기야 파안대소하며, 상대의 모욕을 농담으로 받아치는 여유까지 보이는 빈센조. 동시에, 더는 이 남자에게 정보를 캐낼 수 없다는 판단이 빠르게 선다. 주먹과 칼 다음은 당연히 총. 빈센조는 밝게 웃으며 클리포드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좁은 컨테이너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져서, 집중도가 더 높은 이 시퀀스의 매력은, 크리스토퍼 월켄이 화낼 듯 말듯 미세하게 씰룩이는 표정, 그러면서도 여유로운 척하는 독한 허세에 있다. 그는 차라리 얼른 화를 내줬으면 하는 조마조마함만으로 한 시퀀스를 힘있게 끌고 간다. 1센티 단위의 표정변화로 서스펜스를 만드는 명배우의 포스랄까.
이 영화는 주연을 맡은 클레스천 슬레이터나 페트리샤 아퀘트 이외에도 쟁쟁한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악역 전문 배우들이 많았다. 일단 알라바마(페트리샤 아퀘트)의 악덕 포주 드렉슬 역은 게리 올드만이 맡았다. 90년대의 게리 올드만은 그야말로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악역 전문 배우였다. 얼른 짚어봐도 [트루 로맨스](1993)의 앞 뒤에 [드라큘라](1992)의 드라큘라 역과 [레옹](1994)의 스탠스 필드 반장역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독특한 비주얼로 비열하고 더러운 포주를 연기한다. [블루 벨벳](1986)의 사디스트, 프랭크 부스 역으로 이미 악역의 전설이었고, [트루 로맨스]에 출연한 다음 해엔 [스피드](1994)의 폭탄 테러범 하워드 페인이었던 데니스 호퍼가 클라렌스의 아버지 역을 맡았다. [트루 로맨스]를 이야기할 때, 브래드 피트가 루저로 잠깐 등장하는 장면은 꼭 언급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브래드 피트에게 클라렌스의 행방을 물어보는 조직원이 바로 작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소프라노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 제임스 겐돌피니다. 실실 웃으면서 여자를 맨주먹으로 패는 악당 중의 악당이다.
그러나 이런 마왕들 사이에서도, 빈센조 코코티를 연기한 크리스토퍼 월켄은 다른 배우들의 존재감을 앞선다. 크리스토퍼 윌켄 역시 악역으로 유명한 배우다. 팀버튼의 [배트맨 2] 에서는 고담시의 부정부패에 앞장서는 백만장자였고, [킹 뉴욕]에선 감옥에서 돌아와 뉴욕에 피바람을 일으키는 갱스터였다. {폐쇄구역]에서는 아들을 위협하는 아버지였으며, [닉 오브 타임]에서는 어린 딸을 인질로 아버지 닉(조니 뎁)에게 암살을 종용하는 범죄자였다. 무엇보다 [신의 전사]와 [슬리피 할로우]에는 그냥 악마로 나온다. 그러나 그의 팬들은 크리스토퍼 월켄 최고의 악역으로 [트루 로맨스]의 빈센조를 꼽는다. 생각해보면 영화의 중반부에, 그것도 딱 한 씬에서 10분 등장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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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안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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