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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열전

일상 속의 살인마, <내 연애의 기억>의 현석

by 그럽디다 2021. 7. 25.

영화 속의 악인들을 만나본다. 열한 번째 악인은 일상 속의 살인마, <내 연애의 기억>에서 송새벽이 열연한 현석이다. 

 

은진(강예원)은 우연히 택시를 같이 타게 된 현석(송새벽)과 연인이 된다. 그동안 종류별로 나쁜 놈만 만나느라고 연애의 기억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그녀가 어설픈 듯 순수한 현석의 매력에 빠진다. 어느 날 현석의 휴대폰을 훔쳐보다가 나이 많은 술집 여사장과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한다. 한 시간 동안 로맨틱 코미디로 달려온 영화는 현석이 죽인 술집여사장의 시체를 은진이 발견하면서 전혀 다른 국면으로 치닫는다. 은진이 눈치챘다는 것을 알게 된 살인마 현석. 달리던 차를 멈추고 그녀에게 물어본다. 은진아, 봤니?

  

 

현석은 은진을 자신의 은신처에 감금하고 차근차근 설명한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생활 전선에 내몰려 몸을 팔다가 자살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는 이런 사건들과 관련된 원수들을 찾아 죽이다 보니 연쇄 살인범이 되었다고 했다. 얄궂게도 애니메이션으로 묘사된 그의 기구한 가족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혹은 그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환상인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여전히 어눌하고 느린 그의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다.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송새벽은 참 별난 배우다. 선 굵은 대배우들의 과잉이 그에겐 없다. <마더>(2009) 세팍타크로 형사로 상업영화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그의 일상적인 연기톤은 <방자전>(2010) 변학도로 빛을 보기도 했지만, <7광구>(2011) <아부의 왕>(2012)에서처럼 소비되기도 했다. 그러다 드디어 일상의 살인마를 연기한 <내 연예의 기억>에서 다른 식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묘한 타이밍으로 어눌하게 말하는 현석의 말투는 듣는이를 긴장시키는 매력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에서 잠깐씩 스치는 과격함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더 두렵다. 짐작도 안가는 크기의 악마가 순둥이 현석 안에서 들끓고 있다. 

 

 

이렇게 송새벽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그로데스크함을 끌어내는 데는 주제곡 그대는 어디갔나가 일조했다. 차효선이 부른 이 곡은 언뜻 신중현 선생이 70년대에 빚어놓은 김추자나 김정미 같은 사이키델릭 마녀들과 닮았다. 은진과 현석이 처음 만나던 날 택시 안에서 흐르던 이 음악은, 현석이 살인마임을 눈치챈 은진과, 그런 은진을 서서히 압박하던 현석이 차 안에서 심리 게임을 펼칠 때도 흘러나온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상에 불온한 온기를 하고 불어넣는다. 

 

그럼에도 송새벽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사랑 이야기라고 했다. 이런 식의 사랑이야기도 있을 수 있겠다 싶어서, 출연을 결심했단다. 그러고 보면 연애라는 것이 원래 하루하루 일상 속에서 이어지는 서스펜스 아니던가. 서로의 카드를 감추고 불가해한 상대와 겨루는 게임 아니던가. 남녀관계 이전에, 다른 삶을 살아온 타자에게 곁을 내줘야 한다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인생을 걸어야 하는 살벌한 기회비용이다. 그래서 탈출하려는 은진과 막으려는 현석의 슬로우모션은 피해자와 살인마의 몸싸움이기도 하고, 실연이 닥친 연인들의 애틋한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 이 죽일 놈의 사랑. 

 

사건이 마무리되고 난 다음, 병상에 있던 은진은 핸드폰으로 현석과의 사진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는다. 그때, 저기요.하고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 현석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남자와의 연애가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실연은 누구에게나 각자의 기준으로는 죽을 만큼 힘든 기억이다. 다시는 연애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봤자, 연애라는 서스펜스는 또 속절없이 다가온다. 송새벽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송새벽처럼 알 수 없는 매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