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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열전

살려는 드릴게. 멋에 살고 멋에 죽는 '신세계' 이중구

by 그럽디다 2021. 7. 25.

영화사의 악인들을 만나본다. 네 번째 이야기는 <신세계>의 이중구. 

누군가는 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허세라고 했다. 곧 죽어도 폼나고 싶은 수컷들의 직진본능을 그대로 보여준 이중구는 유독 훌륭한 한국영화가 많았던 올해, 가장 매력적인 악당임에 틀림없다. 어설픈 신경쇠약이나 아팠던 과거 따위에서 이유를 찾지 않는 그냥 악당. 골드문 그룹의 이중구 이사를 만나본다. 

 

이야기는 이렇다. 기업형 폭력조직 골드문의 회장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는다. 회장 자리를 놓고 화교 출신인 정청(황정민)과 정청에게 서열이 밀린 이중구(박성웅)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한편 경찰청의 강 과장(최민식)은 정청의 심복 으로 자리 잡은 비밀경찰 이자성(이정재)을 이용해서 골드문을 한 번에 몰락시킬 작전을 세운다. 작전명은 신세계 프로젝트.

 

 

“놀랐수? 미안, 쏘리.”

골드문의 차기 회장 자리를 정하기 위한 주주총회 날짜가 잡힌다. 이중구는 바쁜 일이 있고 정청과는 겸상하기 싫다며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가버린다. 그는 한 박자 늦게 나온 정청 패거리를 주차장에서 기다렸다가 차로 받을 듯이 위협한다. 석 회장의 교통사고가 자신의 짓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마음만 먹으면 정청을 언제든 공격할 수 있음을 과시한다. 깜짝 놀란 정청과 이자성을 빙글빙글 놀리는 이중구.

 

 

“살려는 드릴게.”

주주총회가 다가오자, 간부들은 정청에게 붙어야 할지 이중구에게 붙어야 할지 눈치를 살핀다. 간부들은 일단 이중구에게 찾아와서 표를 던지면 대가로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를 넌지시 물어본다. 그런 선배들에게 이중구는 자기편이 되면 적어도 죽이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회장을 죽인 것이 자신임을 스스럼없이 밝힌다. 얄팍한 타협이나 뻔한 회유책 따위 없는 정면돌파. 이중구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늙은 너구리들에게 놀아나지 않는다. 

 

 

“그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두 번 다시 그 입에 내이름 담지 마라.” 

강 과장은 여러 가지 혐의를 엮어서 이중구를 잡아넣는다. 아무런 악의 없이 동료로서 면회 온 정청을 이중구는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는 정청이 주주총회를 앞두고 자신을 이기기 위해 강 과장에게 자신에 대한 혐의 자료를 넘겼다고 믿는다. 오해라고 말하는 정청의 말을 믿을 리가 없는 이중구. 극 중에서 이중구의 감정이 가장 높게 폭발하는 순간이다. 

 

 

“이거 쥐약이다. 먹으면 아마 뒈질 거야. 그래도 나로서는 안 먹을 수가 없네.”
“좋아. 내가 칼춤 한 번 춰주지. 춰 준다고.“

강 과장은 이중구에게 이렇게 힘없이 골드문을 정청에게 넘길 거냐고 도발한다. 이중구는 이 모든 것이 강 과장의 시나리오임을 알지만, 정청에게 보복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회장이 될 수 없는 상황임을 알지만, 부하를 시켜 정청을 칠 것을 명령한다. 무엇보다도 이중구는 자신이 움직이는 대가를 강 과장에게 구걸하지 않았다. 건달로서의 자존심을 경찰에게 팔지 않았다. 브레이크를 밟기 너무 늦었을 때, 액셀을 더 꽉 밟아 버리는 남자. 설령 그 결과가 거대한 파멸이라도,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은 슬프고 미련한 짐승이 으르렁댄다.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이중구의 부하들에 의해 정청이 제거되자, 강 과장은 보란 듯이 이중구를 풀어준다. 눈 부신 태양 아래 풀려나던 날, 자신을 마중 나온 부하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을 보고, 이중구는 죽음을 직감한다. 이중구는 웃었다. 이자성의 부하들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기다리는 자신의 아지트로, 아직 공사 중이지만 고급 소파와 폼나는 위스키 바를 성급하게 차려 놓은 그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벽 뒤에 숨어 있는 이자성의 부하들에게 말한다. “어이. 거기 누구 담배 있으면, 하나만 주라. 갈 때 가더라도 담배 한 대 정도는 괜찮잖아? ?” 한평생 직진만 해 온 한 수컷의 굳센 체념. 이중구는 그렇게 완성하지 못한 야망의 성에서 이자성의 부하들에 의해 추락사한다. 

 

 

한 가지 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을 소개한다. 강 과장이 이중구를 체포하던 날. 이중구는 아침부터 부하들에게 스테이크 정찬을 먹이고 있었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행동대장이 듣기 거북할 정도로 과한 충성심을 보인다. 또 다른 부하는 민감한 사업 이야기로 심기를 건드린다. 보통의 누아르에선 이 타이밍에 아주 작은 이유로 부하 하나를 족치는 게 클리셰다. <넘버 쓰리>의 송광호나 <달콤한 인생>의 황정민도 비슷한 방법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잔인한 보스의 캐릭터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중구는 이 장면에서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부하의 거북한 행동에 농담을 섞어가며 타이른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갑자기 불같이 성질을 낼 것만 같은 조마조마한 공기가 화면을 압도한다.  

신세계

이 점이 바로 품격있는 악당의 힘이지 않을까. 박훈정 감독의 훌륭한 연출 리듬감이 한몫하긴 했지만, 박성웅이 만든 이중구라는 악당은 자신의 악행에 구구절절한 이유를 달지 않고도 그 자체로 매력적인,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악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