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필모그래피에서 <붉은 돼지>는 독특한 색으로 빛난다. 마초 성향이 뚜렷한 남자가 주인공이고, 주인공이 인간처럼 사는 돼지라는 점을 빼면 판타지 요소도 극히 드물다. ‘하늘을 난다’는 테마는 그의 작품들에서 자주 변주되긴 하지만, 특히 <붉은 돼지>는 주인공의 직업부터 비행기의 고증까지 그 테마에 밀착해있다는 점도 예외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탈리아. 파시즘이 번져 무질서하지만 낭만이 남아 있는 아드리아 해를 배경으로, 날개에 이상을 싣고 자유를 추구하는 돼지가 있다. 마르코라는 이름의 이 돼지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비행 실력으로 공적(하늘의 해적)들로부터 평화를 지키며, 그 상금으로 먹고사는 한량이다. 비행할 때가 아니면 거의 항상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을 쐬고, 밤이면 가끔 호텔 ‘아드리아노’의 바에서 술 한 잔을 곁들여 식사하는 것이 전부다. 그 외에 다른 돼지는 일절 등장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가 돼지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인다. 왜 돼지인지에 관한 설명에는 불친절하다. 그래도 프리랜서 파일럿이 되기 전의 과거는 대충 설명이 된다. 그는 지난 전쟁에서 활약했던 파일럿이고, 뛰어난 공훈을 세웠던 전쟁 영웅이다. 그러나 전쟁 중 어떤 시점에 돼지가 되고, 전역했다.
전쟁이 끝난 후 파일럿들의 삶은 갈피를 잃었다. 일부는 공적이 되어 유람선이나 비행선을 약탈하며 살고, 또 다른 파일럿들은 이들을 잡아 상금을 받는다. 공통점이 있다면, 정규군에서 버림받았거나 군을 떠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직업이 없어졌지만 비행을 계속하는 것은, 목표를 이루는 길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적들의 목표는 돈이다. 그들은 더 많은 보석을 약탈하고, 아이들을 납치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다른 파일럿들은 이들을 잡아 상금을 받는데, 마르코는 더 많은 돈을 버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편 미국인 파일럿 커티스는 분명한 꿈이 있다. 이 일대에서 무용담을 만들어 유명해지고 나면,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배우가 될 것이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물론 미녀와의 결혼도 목표다. 가장 뛰어난 실적을 세우기 위해 최고의 파일럿이라는 마르코와 대결해서 이기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공적과도 흔쾌히 손을 잡는다.
이처럼 돈은 이 세계에서 중요한 동기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휴지조각 취급을 받고 있어 문제다. 무솔리니 정권은 이런 국내 정세의 혼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파시즘을 내세웠다. 군의 규모가 커지고, 권력도 늘어나며 불안한 정국을 조장한다. 전쟁 당시 마르코의 비행 실력은 공군 내에서도 최고로 꼽혔다. 군은 다른 파일럿들에는 관심이 없지만 마르코에는 주목한다. 군 시절의 동료였고, 지금도 장교로 복무 중인 페라린은 정부가 마르코를 감시하고 있다며, 비행기 수리비에 허덕이는 삶을 때려치우고 공군에 복귀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마르코는 냉소적인 말로 거절한다.
“파시스트보다는 돼지가 낫지.”
공리주의 철학자 J. S. 밀의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낫고,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말은 자본주의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비판하는 말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물질에 비판적이지 못하고 탐욕만 남은 치히로의 부모를 돼지로 만들며 이와 유사한 비유를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붉은 돼지>의 마르코는 이 말을 뒤집어 파시즘을 비판하는 데 쓴다. 돼지보다 못한 것이 파시스트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돼지여서 인간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늘 인간들에게서 한발 떨어져 지내면서 인간들을 관찰한다. 가끔 맘에 드는 언행을 하는 인간에게 “인간 중에서도 맘에 드는 인간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요컨대 마르코는 자신이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점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애니메이션<붉은 돼지> ⓒSTUDIO GHIBLI
2부에 계속
저작권자 ⓒRUN&GUN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글쓴이 : 윤지원
'본 영화 또 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시시콜콜한 정보 모음 (0) | 2021.12.09 |
---|---|
<붉은 돼지> “파시스트보다는 돼지가 낫지” (2부) (0) | 2021.12.07 |
<덤 앤 더머 투> 뇌끄고 보는 짐 캐리 영화의 매력 (0) | 2021.12.06 |
원조 꽃미남 듀오의 <탑건 2>가 돌아온다. (0) | 2021.12.06 |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TV 시리즈로 돌아온다. (0) | 2021.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