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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언니들의 언니. <이중배상>의 필리스

악인열전

by 미드나잇 스포일러 2021. 7. 2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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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르는 남자들의 영화다. 그러나 예쁘고 나쁜 여자를 만나서 인생이 휘청거리는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더욱 남자들의 영화인지도 모른다. 예쁜 여자의 유혹에 열 번이라도 넘어가고야 마는 것이 남자이기 때문이다. 악인열전, 오늘은 팜므파탈의 원조, 나쁜 언니들의 언니. <이중배상>의 필리스를 만나본다. 

유능한 보험 판매원 월터(프레드 맥머레이)는 석유 재벌인 디트리히슨의 자동차 보험을 갱신하기 위해 그의 저택에 갔다가 부인 필리스(바바라 스탠윅)를 만난다. 디트리히슨과 최근에 재혼한 금발미녀 필리스는, 마침 일광욕 중이어서 아슬아슬한 차림으로 월터를 맞는다. 계단 위의 필리스를 올려다보는 월터. 이 장면에서 그는 이미 졌다. 

 

필리스는 가슴팍의 단추를 잠그면서 계단을 내려온다. 이 잔망스러운 여자는 커다란 소파의 한쪽 구석에 가녀린 몸을 맞춘다. 소파의 남은 공간이 마치 곁을 내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메시지 같았다. 무엇보다도 월터의 혼을 쏙 빼놓은 것은 매끈한 다리와 발목에 걸려 있는 발찌였다. 월터가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리를 꼬고 앉았으면서, 그의 칭찬이 불편한 척 슬며시 다리를 내려놓는다. 말하자면, 요염이라는 것이 몸에 밴 여자. 상대를 어떻게 하겠다는 의도가 없더라도 일상에서 숨 쉬듯이 누군가를 유혹하는 게 버릇인 여자였다. 

이런 요부가 목적을 정확히 하고 월터를 유혹하기 시작한다. 필리스는 남편도 가정부도 없는 시간을 골라 그를 부른다. 이번엔 긴 소파에 몸을 눕히듯이 기대더니, 옆에 월터가 앉기를 유도한다. 남편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둥,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다는 둥 말을 돌리다가, 남편 몰래 사망보험을 들 수 있는지 슬며시 물어본다. 월터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난다. 사고를 가장해 남편을 죽이고 사망보험금을 차지하려는 필리스의 의도를 단박에 간파한 월터는 그녀에게 화를 내고 돌아간다. 

단호하게 돌아왔지만, 잠들 수 없는 그날 밤. 마침 비가 오고,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린다. 아니나 다를까 필리스였다. 월터가 모자를 두고 가서 가져다 주러 왔다며 문을 열어달란다. 하필이면 비까지 내리는 이 밤에? 무엇보다 월터는 모자를 두고 오지 않았다. 필리스는 월터에게 다가가, 그의 차가운 말투에 상처받았으니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달라고 말한다. 결국, 으스러지게 키스하는 월터. 한 남자의 도덕이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그러니까 인생을 한방에 건 키스였다. 사실 영화는 지금부터가 사건의 시작이다. 월터는 필리스의 계략에 넘어가 대부호 디트리히슨을 죽인다. 완전범죄를 꿈꾸는 두 사람과 그 뒤를 명탐정처럼 쫓아 수사망을 좁혀오는 월터의 상사 키즈(에드워드 G.로빈슨)가 활약하는 장면들도 흥미롭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남자가 나쁜 여자를 만나 인생이 망하는 이야기다. 월터가 계단 위의 필리스를 올려다본 시점에서 이미 끝난 이야기다. 나머지는 불행한 결말을 알면서도, 그곳으로 어쩔 수 없이 척척 걸어갈 수밖에 없는 한 바보 같은 남자의 뒤를 쫓을 뿐이다. 

필리스를 연기한 바바라 스택웍은 유성영화가 시작하던 시점에 다양한 작품에서 나쁜 여자를 연기했지만, 그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대단한 장면이 있다. 다른 남자를 이용해 자신까지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월터가 필리스를 찾아왔을 때, 필리스는 이번엔 보란 듯이 소파의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앉아 그를 맞는다. 결국, 어두운 방 안에서 월터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고백한다. 자신은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지만, 당신을 쏘고 나서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그러니까 아무 말 말고 안아달라고. 맙소사. 이 여자 정말 뭘까?

 

 

누아르 영화에서 팜므파탈(femme fatale)을 이야기할 때, 남성들이 느끼는 가부장적 공포를 읽기도 하고, 신여성의 기운찬 독립성을 찬양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팜므파탈이란 것은 그렇게 센 여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누구든 끝도 없이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며, 자신의 욕망에 온통 충실한 어리광쟁이일지도 모른다. 남자들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순수한 위험을, 그저 나쁘다고 부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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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안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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