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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열전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 없는 '밀양' 박도섭

by 그럽디다 2021. 7. 8.

 

 

 영화 속의 악당들을 차례로 만나 본다. 두 번째 악당은 <밀양>의 유괴 살인범 박도섭이다.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남자를 용서하러 간다. 좁은 면회실 안. 이창동 감독은 촬영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면회실 세트를 실제 싸이즈대로 답답하고 작게 만들었다. 면회실 유리 너머로 드디어 얼굴을 드러낸 살인마 박도섭. 신애(전도연)는 도섭의 얼굴만 봐도 치가 떨리지만, 신의 이름으로 원수를 용서하려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박도섭의 얼굴이 구도자처럼 평온하다. 그는 말한다. 자신도 신 앞에 무릎을 꿇었노라고. 그래서 이미 용서를 받았노라고. 신애의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미 용서를 받았다니, 말 그대로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가 없는 인간이다.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인 신애의 동의 없이 물리적인 복수는 법의 이름으로 차단되었고, 정신적인 용서는 신의 이름으로 선행 돼버렸다.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지만, 면회실의 유리 벽이 살인마 박도섭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중견 배우 조영진이 연기한 살인마 박도섭. 조영진은 영화에서 주로 독재자, 황제, 회장, 협회 이사, 교수 등의 역을 맡아온 미중년 배우다. 준수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통속적이고 속물적인 느낌이 나는 그는, 자신의 그런 표정들을 잘 쓸 줄 아는 연기자다. 여기서도 언뜻 보이는 의뭉스런 표정만으로 범죄 동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극의 흐름을 만든다. 

 

지역사회에서 웅변학원 원장 박도섭은 다른 사람보다 또렷한 말투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엘리트들이 얻는 관능을 쉽게 허락받았다. 학원의 자체 발표회 뒷풀이를 핑계 삼아 학원생의 어머니들과 대낮부터 벌어진 술자리. 왠지 모를 들큼한 공기가 찌개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 와중에 신애에게 땅 계약과 관련한 전화가 걸려온다. 죽은 남편의 고향에 내려와 사는 돈 많은 미망인으로 보이고 싶어서, 허세를 떨며 이리저리 땅을 알아보고 다니던 신애가 나보라는 듯이 땅 계약을 하러 간다며 자리를 나선다. 이때 박도섭이 신애를 보내는 표정이 심상치 않다. 뭔가 미안하고, 뭔가 안절부절못한다.

사실 박도섭은 신애의 아들을 죽일 정도의 악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언뜻 멀끔하고 수완 좋아 보이는 이 웅변학원 원장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삼류 무협지가 잔뜩 꽂혀있던 그의 서재처럼, 계획 없고 전략적이지 못한 사람이다. 유행이 지난 웅변학원으로 근근이 먹고살고,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잘 다루지 못하는 요령부득의 남자. 그렇게 한세상 얼렁뚱땅 살아온 박도섭은 이렇게 큰 죄를 지어 놓고도 쉽게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의 죄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다. 억장이 무너지는 어미의 울음을 뒤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크든 작든 우리는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산다. 누구에겐 가는 나도 악인 일 수 있다. 문제는 죄를 저질렀을 때의 태도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이 결국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감독은 영화의 원작 소설인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읽는 동안, 피해자들의 동의 없이 화해를 논하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숨어있음을 직관했다고 한다. 시대의 악인 전두환과 노태우도 처음부터 악인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엄청난 죄를 저질렀고, 법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얼렁뚱땅 정리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전두환 일가가 밀린 숙제 하듯 추징금을 정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넘버3>에서 마동팔 검사(최민식)의 명대사로 글 맺는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X 같아 하는 말이 뭔 줄 알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솔직히 그 죄가 무슨 잘못이 있냐. 그걸 저지른 놈이 잘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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