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감독 연상호가 <돼지의 왕>에 이어 발표한 <사이비>가 뜨겁다. 한국 콘텐츠 시장에서 ‘늪’과 같은 존재였던 성인용 장편 애니메이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성인이 볼만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은 엄청난 시련이었다. 중요한 작품들을 짚어본다.
1. 부끄러운 문화제 <블루시걸> (1994)
한국 최초의 성인용 애니메이션을 표방하던 이 작품은, 당시 최고의 섹시 스타였던 최민수와 김혜수가 남녀 주인공의 목소리를 맡았다. 엄정화와 조형기도 각각 비중 있는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한다.
일본 야쿠자가 가지고 있던 한국의 보검이 사라지자 하일은 일본과 뉴욕을 오가며 보검의 행방을 찾는다. 자동차 디자이너인 연인 채린이 모터쇼 준비로 바쁜 와중에 하일은 미국 유학시절 연인이었던 조슈아를 만나 여러 가지 도움을 받는다. 보검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슈아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하일. 보검을 가져간 마피아와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는데, 공교롭게도 그곳은 채린이 모터쇼를 준비하는 뉴욕의 한 건물이었다.
정부도 제작에 많은 지원을 했으며 완성 후에는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에 들어갔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작품은 엄청나게 조악한 수준이었다. 성인용 극장 애니메이션을 위해 조상들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후대가 잘 이해해 주길 바랄 뿐이다.
2. 새로운 시장을 고민했던 <누들누드> (1998), <누들누드 2> (1999)
<누들누드>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잇따라 실패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때문에 투자자를 찾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다. 이 작품은 그런 시장 상황에서 당시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비디오 시장을 겨냥했다. 예상대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양영순의 원작을 사랑했던 팬들이 그대로 비디오로 넘어왔다. 1편의 성공으로 2편까지 제작된 흔치 않은 선례를 남겼다. 당시에는 이런 포맷이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활로로 인식되어 <69핑크 라이더스>등이 같은 방식으로 제작되고 배급되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3. 최초로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문제작 <해피데이> (2002)
최초로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았던 본격 성인 애니메이션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마케팅 카피는 무려 ‘사이다처럼 톡 쏘는 감각적 소프트코어!’ 였는데, 표현수위는 웬만한 하드코어 포르노를 능가했다. 낮에는 대기업 기획실의 유능한 사원이지만 밤이면 여자들을 극락으로 보내는 화려한 테크닉을 가진 카사노바 장민우와 도도하면서도 섹시한 여기자 신승희의 러브 스토리다.
언론과 기업의 유착관계, 산업스파이 문제 등 나름 굵직하고 ‘어른스러운’ 주제들 사이로 ‘어른스러운’ 정사 장면들이 가득하다. 제작기간 3년에 (당시로써는 많았던) 20억 원을 투자해서 만든 애니메이션이었지만 흥행에는 참패. 마침 <노랑머리>, <거짓말>, <둘 하나 섹스> 등의 영화가 연달아 등급보류 판정을 받으면서,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과 등급기관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이슈를 만들던 시절이었으나, 작품 자체가 워낙 형편없어서 담론에 끼어들지도 못했다.
4. 의미 있는 한걸음 <원더풀데이즈> (2003)
전쟁 이후 권력자들은 인공지능 도시 ‘에코반’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수가 늘어난 하층민들은 방사능에 피폭되었다는 이유로 집권자들에게서 에코반 입주를 철저히 거부당하다. 결국 난민촌을 형성하여 집단거주하는 가운데, 에코반에 대한 저항 세력이 형성된다. 어느 날 에코반의 유능한 경비대원 제이는 침입자를 추적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첫사랑 수하였다.
환경에 대한 굵직한 메시지가 있지만 정작 스토리 자체는 많이 엉성했다. 그러나 작화와 그래픽에서는 기존의 국내 작품에 비해 엄청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흥행에는 다시 참패. 이승열이 부른 주제가 <비상>으로 기억하시는 분들도 많다.
5. 양아치 애니메이션의 선전 <아치와 씨팍> (2006)
오직 인간의 똥만이 세계를 움직이는 에너지원이 된 세상. 시민들의 엉덩이에 배변량을 감시하는 아이디 칩이 심어지고, 이를 정부가 감시한다. 인간의 권리가 배변량으로 결정되는 사회. 정부는 더 많은 똥을 얻어내기 위해 시민들이 배변할 때마다 ‘하드’라는 중독성 강한 마약 물질을 준다.
원래 플래시로 인기를 얻던 작품을 애니메이션 했는데, 독특한 캐릭터와 스토리 전개 방식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스페인 시체스 영화제 최우수 에니메이션상을 받았고, 로테르담 영화제, 프랑스 앙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미국 시애틀 국제 필름 페스티벌, 호주 멜버른 국제 필름 페스티벌 등에 초청되었다.
‘양아치’ 애니메이션을 표방하는 이 작품은 양아치계의 두 거성 류승범과 임창정이 목소리 연기를 했으며, 그 외에도 신해철, 현영등이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무엇보다도 애니메이션에서 일상에서 사용되는 욕을 시원하게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6. 집념으로 빚은 실패작 <오디션> (2009)
천계영의 인기만화 <오디션>을 원작으로 9년간의 제작기간을 거친 대작. 일본 도에이사의 미술과 스토리보드 전문인력이 투입되는 등 야심 차게 시작되었다. 음악 애니메이션인 만큼, 주제가를 위한 별도 오디션이 진행되기도 했고, 일본의 인기밴드 ‘라르크 앙 시엘’을 비롯한 박혜경, 크래쉬, 닥터코어 911등이 OST에 대거 참여했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재벌 송송그룹의 상속녀인 송명자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4명의 음악천재 소년을 찾아야 한다. 이 4명의 천재 소년이 오디션에서 우승해야만 그룹을 이어받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송명자는 친구 박부옥의 도움을 받아 4명을 찾는 데 성공하지만, 개성 강한 멤버들을 하나의 밴드로 만드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제작기간이 9년이라고는 하지만 중간에 투자가 끊겨 몇번이고 엎어졌던 작품이다. 2006년부터 비로소 제작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오랜 집념의 결과로 2009년 개봉했지만 그 사이 3D 애니메이션이 일반화되어, 2D 애니메이션에 대한 선호도가 급감했다. 그러나 사실 2D 시절의 눈높이로 봐도 <오디션>은 작품성과 기술력 모두 낭패인 시대착오적 결과물이다.
7. 답답한 시장을 시원하게 꿰뚫는 역작 <돼지의 왕> (2011)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애니메이션은 홧김에 아내를 살해한 경민과 소설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대필작가로 살아가는 중학교 동창 종석이, 자신들의 중학교 시절 감추어 두었던 비밀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그들의 중학 시절엔 어른들의 사회를 축소한 것같은 지옥이 펼쳐졌던 것이다.
연상호 감독은 레이아웃을 3D로 잡고, 그 위에 2D 작화를 입히는 방식으로 비용과 시간을 절약했다. 철저하게 1인 스튜디오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표현방식을 따른 것이다. 목소리 연기도 남다르다. 흥행이나 화제성에 주안점을 두어 인기 연예인을 섭외하던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철저히 캐릭터를 가장 잘 소화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영화 <똥파리>의 나쁜 남자 양익준을 비롯한 오정세, 김혜나, 김꽃비 등 인디 영화계의 명연기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놀랍게도 먼저 배우들의 목소리를 녹음한 다음에 그림을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배우들의 감정선이 애니메이션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내용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시장의 한계를 시원하게 꿰뚫은 역작이다. 이제 제작비의 한계나 소재의 특이함이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아무런 핑계가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연상호 감독의 다른 작품 <사이비>와 <창>도 놓치지 마시길.
이미지=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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