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희와 3개월 사귀고 군 생활 1년 연장. 군대 고참이 후임에게 반드시 던지는 이 오랜 질문은 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의 이름으로 교체되면서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왔다. 대한민국 군인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이 질문 때문에 밤잠 못 이루며 고통스러워해 본 경험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질문의 악마성은 첫째, 되도 않는 허황된 설정이라는 것에 있고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데 있다. 내가 왜 이 불가능한 설정에 고민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도저히 심각하게 이리저리 재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고야 마는. 사실 이 같은 질문은 여러 가지 다양한 컨셉으로 변형되어 꼭 군대가 아니더라도 남자들만의 술자리에서 흔히 등장하며 쓸데없이 진지한 토크 배틀을 벌이게 한다.
군대 다시 다녀오고 아이유와 결혼 하기랄지, 강민경과 클럽 가기 VS 수지와의 워터파크 데이트 등등. 주위 남자들이 이처럼 쓸데없는 질문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할 일 더럽게 없다고 코웃음을 쳤건만, 최근 들어 나의 경솔했던 행동을 뼈저리게 반성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나 또한 매주 수목 밤마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잠 못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아 어쩌란 말이냐. 김탄이냐, 최영도냐.
우선 확인할 것이, <상속자들>은 이제껏 있었던 판타지와는 다르다. 드라마 속 왕자와 신데렐라의 설정은 현대에 이르러 재벌 2세와 평범녀의 로맨스로 굳혀졌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자세한 배경과 설득력 있는 설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드라마 속 재벌 2세는 ‘국내 굴지 기업’의 회장님 아들이라서 ‘실장님’이던 것보다, <상속자들>의 남주인공들은 철저하고 명확하게 그 신분과 계급이 나누어져 있다. 이들은 크게 4개 계층으로 분류되는데, 첫 번째는 기업을 물려받는 경영상속집단, 그다음 경영권은 없지만 태어날 때부터 대주주인 주식상속자집단, 세 번째가 돈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하는 법조계나 의학계, 학자, 정치인의 2세인 명예 상속자집단, 그리고 여주인공 설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소외계층인 사회배려자 집단이다. 이들은 각자 소속된 계층에게 맞는 캐릭터 설정대로 행동하고 다른 계층과 갈등한다.
드라마의 축을 이루며 매 회 갈등을 고조시키는 두 남자주인공은 모두 경영상속자이다. 그럼 지금부터 제국그룹 상속자 김탄과 호텔 제우스 상속자 최영도에 대한 비교분석을 해보자. 둘 다 너무 멋지므로 이 둘 중의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괴롭지만, 두 남자 모두를 사랑할 수도 없는 일.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하듯, 판타지를 즐기려는 자 이 오글거림을 견뎌야지 어쩌겠나. 어쩌면 그것이 '상속자들'을 보는 진짜 재미일지도.
1. '상속자들' 왕자의 기품, 김탄 vs 섹시한 카리스마, 최영도
김탄은 자기가 잘 생긴 걸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잘 생겼다. 고등학생의 외모라기엔 무리가 있지 않으냐는 냉정한 평가도 있지만, 이미 나이 설정이 무색할 정도의 완전한 외모이기 때문에 이에 토를 다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고집을 부려도 우아하고 무심하게 굴어도 섭섭하지 않다.
이게 다 얼굴 때문이다. 차은상에게 화를 내도 잘생기고, 형 때문에 속상해해도 잘생겼으니 어쩌란 말인가. 이따금 짓궂은 컨셉으로 나오는데 머리끈을 잡아 빼는 장난을 할 때면 꺄악하는 비명이 절로 나오며 나도 한번 당해보고 싶다는 생각부터 드는 것이다. 반면 최영도의 장난은 귀여운 수준을 벗어난다.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가방을 빼앗아 바닥에 던진다. 최영도는 확실히 사람을 긴장시킨다.
그래놓고 불쑥 나타나 경찰을 자처하며 악의 무리(?)를 내쫓아주질 않나, 자는 걸 빤히 쳐다봐서 설레게 하질 않나, 정말 신경 쓰이게 하는 행동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인상에 미남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지만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분명히 있는 마스크와 우월한 기럭지를 가지고 있다. 차은상조차 최영도의 쓸쓸함에 무장해제될 뻔한 걸 보면 최영도는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거칠고 못돼먹은 남자, 그러나 안쓰러움에 자꾸만 신경 쓰이게 하는 남자다.
2. '상속자들' 서자의 아픔, 김탄 vs 엄마 없는 슬픔, 최영도
둘 다 어마어마한 집안의 상속자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속을 파보면 저마다 치명적인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김탄은 비공식의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를 곁에 두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는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랑하는 형 또한 김탄의 존재 자체를 미워하고, 아버 지 또한 같은 이유로 자신에게 사랑 없는 비즈니스적 결혼을 강요한다. 아무런 욕심 없이 온 가족이 행 복하길 바라는 김탄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궁전 같은 집 안 어디에도 없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나 한 번도 가족의 온정으로 채워지지 못한 김탄의 내면에는 가진 것 없어도 엄마와 둘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차은상이 들어앉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최영도도 마찬가지다. 남다른 정력의 소유자인 아버지 덕에 어머니는 진작에 아들을 버리고 떠났고 어머니의 빈자리는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숱한 애인들만을 보고 자란 덕에 모나고 거칠고 자기방어적이다. 거기다가 강하게 훈육할 줄만 아는 아버지 탓에 누구에게도 사랑받고 사랑을 준 경험이 없다. 그래서 좋으면서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몰라 어린 아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만, 재벌들 세계의 이해타산에 관심 없고 똑부러지게 속세를 살아가는 차은상의 존재가 커지면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3. '상속자들' 기대고 싶은 김탄 vs 보듬고 싶은 최영도
김탄과 최영도는 아주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르다. 부족한 것이 없는 배경 속에 치명적인 가정사를 품고 사는 것은 똑같지만, 김탄은 자신을 둘러싼 가족들의 갈등 관계를 때론 인내하고 때론 도망치며 나이보다 성숙하게 대처하려고 한다. 주변의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지만 그러므로 차은상만큼은 지키려고 애쓰는 행동 하나하나에 그의 진심이 묻어난다. 반면 최영도는 철듦을 거부하며 반항한다.
재혼하려는 아버지를 끊임없이 훼방 놓고, 얻어터지고 쓰러지면서도 누구에게든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차은상은 미국에서의 꿈만 같던 시간과 그때부터 이미 너무 커져 버린 김탄의 존재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현실을 붙들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거기다가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최영도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김탄과 최영도 사이의 고민은 '상속자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놓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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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상속자들'이 방영되던 당시 작성된 리뷰입니다.
이미지=SBS
글쓴이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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