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특집

영화 속 패션 '레인코트' 비는 막고, 욕망은 숨긴다

by 꿀마요 2023. 5. 6.

 


  
생각해보면 현대인의 옷차림은 참으로 간소해졌다. 이제는 딱히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반드시 특정한 복장을 갖출 필요도 없고, 날씨에 따라 특별한 옷을 입어야만 한다는 법칙도 없어졌다. 예를 들자면, 20세기 초반까지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보울러 햇(위가 둥근 모양의 중절모 )을 쓰지 않고 출근하는 일은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 아울러 이제는 교회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갈색 구두를 신고 예배를 보러 간다고 지탄받는 시대가 되지 않았으며, 비가오는 날에 레인코트가 아닌 간소한 셔츠 차림으로 다닌다고 해서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있는 시대도 아니게 되었다.

오늘은 영화에 의례히 비가 오는 장면에 등장하던 레인코트를 이야기 해보고자. 비오는 날 어스름한 저녁에 레인코트를 입고 골목길을 어슬렁 어슬렁 걷는 멋쟁이의 상징이었던 레인코트는 비록 시대를 거치며 우산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특별한 이미지를 코트 깃 속에 숨긴 아이템으로 남아있다. 사실,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우산은 부의 상징이었고, 원래는 햇빛을 막는 용도였다. 남녀 할 것없이 비오는 날에는 무조건 레인코트를 입고 다녔다.(동양에도 “도롱이”와 갈모가 있었지 않은가!). 이러한 문화를 바탕으로 레인코트는 계급에 따라 달리 발전을 했는데, 지체 높으신 양반들은 고급 옷감으로 만든 현대의 코트와 비슷한 모양의 외투에 케이프(cape, 망토)가 붙은 옷을 입었고, 그 아래 계층들은 그냥 망토나 (예비역 들이라면 욕부터 나올 그 망할놈의) 판초우의를 입고 다녔다.

현대적인 의미의 레인코트가 등장한 것은 바로 트렌치코트의 등장 이후였다.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 트렌치코트는 원래 참호(Trench)에서 비를 막기 위한 용도로 사용 된 코트였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참호 속에서 비와 추위를 막기 위한 다양한 옷들이 개발되었다. 그 중 하나가 지난 회에 소개한 티셔츠였고, 다른 하나가 바로 트렌치코드다. 트렌치코트를 자세히 보면, 어깨에 견장이 달려있다던가, 독특하게 옷깃이 넓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 ‘군용품으로서의 트렌치코트’의 흔적이다. 이러한 트렌치코트는 다분히 남성적인 옷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험프리 보가트를 위시한 전형적인 멋쟁이들은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처럼 음산한 날씨에 이러한 레인코트를 입었고, 프랑스 느와르의 고전 <파샤>의 쟝 가뱅도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험프리 보가트
<파샤>에서 험상궃은 표정으로 코트를 입은 쟝 가뱅(가운데). 다른 두명도 훌륭한 코트를 입고 있다.



<카사블랑카> 영화소개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2882

<파샤> 영화소개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55046


앞서 말했 듯 20세기 중반 이후, 패션이 점점 간소화 되면서 레인코트는 점점 독특한 상징성을 띄게 된다. 그 한가지는 힘이고, 다른 한가지는 음산함이다. 현대의 레인코트가 본디 남자의 옷이었고 그에 따라 ‘온 몸을 감싸는 절제된 완고함’을 보여주는 옷이기 때문에 그 안에 무기가 들어있을지 무엇이 들어있을지 알 수 없는 옷이기도 하다(컴퓨터 형사 가제트는 이를 코믹하게 패러디 했다). 여튼 그렇기에 여성 캐릭터에게 레인코트를 입힌다는 것은 그 여성으로 하여금 ‘무언가 뜻하지 않은 일을 벌일 것’이거나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상징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제 하나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영화 <여죄수 701호 사소리>는 이런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감옥에서 탈옥한 사소리는 자신을 속여서 감옥에 집어넣은 남자들을 검은 코트와 챙 넓은 모자를 착용하고 하나하나 살해한다. 검은 코트 안에서 칼이 튀어나오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 물론, <베른린>에서의 사연 많은 전지현도 트랜치코트를 입고 있다. 

<여죄수&nbsp;701호&nbsp;사소리>에서&nbsp;검은&nbsp;코트를&nbsp;입고&nbsp;자신을&nbsp;감옥에&nbsp;넣은&nbsp;경찰을&nbsp;찾아가는&nbsp;사소리(카지&nbsp;메이코&nbsp;분)
<여죄수&nbsp;701호&nbsp;사소리&nbsp;원한의&nbsp;노래>에서&nbsp;복수를&nbsp;완수한&nbsp;사소리의&nbsp;모습.&nbsp;여전히&nbsp;특유의&nbsp;검은색&nbsp;코트를&nbsp;입고&nbsp;있다.&nbsp;사소리&nbsp;시리즈는&nbsp;훗날&nbsp;여성&nbsp;복수극의&nbsp;원형이&nbsp;되어&nbsp;영화&nbsp;<킬빌>의&nbsp;모티브가&nbsp;된다.&nbsp;사소리&nbsp;시리즈의&nbsp;주제곡은&nbsp;<킬빌>의&nbsp;엔딩곡으로&nbsp;그대로&nbsp;쓰이게&nbsp;된다.

 

<베를린>의 팔자 사나운 공작원 전지현의 트랜치코트

<여죄수 사소리 701호>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55445

<여죄수 사소리 701호 원한의 노래>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54335

<베를린> 영화소개

어두운 날에 입는 옷이라는 공식 때문인지, 레인코트는 음산함이라는 코드가 따라붙게 되는데, 이 음산함은 종종 변태적인 이미지도 함께 따라붙곤 한다. 그래서인지 소위 말하는 ‘노출광’들이 애용하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서양에는 레인코트 페티쉬라는 상당히 매니악한 취향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더군다나 본래는 단순히 면직물이나 울로 만들어지던 레인코트가 20세기 들어서 PVC 소재나 고무 소재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특별한 소재에 열광하는 일부 사람들’은 레인코트에 더더욱 환장하게 된다. 이런 복잡한 사정 때문인지, 영화 <위험한 독신녀>에서는 레인코트 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이 남자를 킬힐로 찍어(!) 살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레인코트가 없었다면 어떤 느낌이 되었을까? 아마도 자연 그대로의 몸이 등장했기 때문에 훨씬 수수한 장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번쩍거리는 레인코트의 등장으로 이 장면은 그야말로 뒤틀리고 변태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물론 가치판단을 배제하자면, 변태는 나쁜게 아니다.)

&ldquo;위험한&nbsp;독신녀&rdquo;에서&nbsp;레인코트를&nbsp;입은&nbsp;여성에게&nbsp;킬힐로&nbsp;살해당한&nbsp;직후


레인코트는 그 자체로 멋진 옷이다. 레인코트는 그 자체로 절제 된 옷이다. 레인코트는 그 자체로 힘을 지닌 옷이다. 레인코트는 그와 동시에 뒤틀린 욕망을 숨길 수 있는 옷이다. 그래서 레인코트는 당신이 아닌 타인에게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옷이기도 하다. 여름이 시작되었다. 수트나 고운 옷을 입어야 하는 날이라면 레인코트를 입어보자. 가치판단은 저마다의 방식에 맡기고.

저작권자 ⓒRUN&GUN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